투쟁의 기록

윤웅태 동지를 기억하며

조성웅 0 1,554

 

부산반빈곤센터 대표와 사무장, 내게 윤웅태 동지는 최고운 동지 곁에 항상 있는 사람이었다. 윤웅태 동지는 85크레인 희망버스 때 부산에서 처음 만난 것 같고 2014년 겨울 재능농성장이 있는 혜화동 양평해장국 집에서 그와 술자리를 가진 것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의 얼굴빛은 검었고 항상 모자를 썼으며 과묵했다. 몇 차례 만나고 술자리를 함께 했지만 그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장례식장과 솥발산 하관식까지 윤웅태 동지의 지인들이 이야기하는 그의 삶을 듣고 복기하면서, 비록 그는 떠났지만 비로소 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삶-투쟁을 따라 배우고 싶어졌다. 그를 따라 배우고 싶은 건 내 삶-운동을 되돌아 보고 싶다는 거다.

솥발산 하관식 추도사에서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윤문호 동지는 "10여년 전 기관지에 실린 윤웅태 동지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글을 보고 부산에도 이렇게 훌륭한 동지가 있구나. 만나고 싶었다. 부산으로 내려가 그를 만났다"고 회상했다. 2004년 무렵 윤웅태 동지가 '노동자평의회를 향한 전국회의 운영위원'이자 부산 울산 조직담당자였단 것도 이번에 알았다. 윤웅태 동지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가 꿈꾸었던 프롤레타리아독재, 노동자평의회공화국을 향한 현시기 수단과 방법들에 대한 논의는 더욱 풍부하게 보다 구체적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반빈곤운동", 내가 참가해본 적이 없는 운동이다. 간접적으로만, 전술문제와 투쟁평가서 형태의 문서로만, 몇차례 연대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내 경험의 전부였다. 그렇기에 윤웅태 동지가 자기 생애와 목숨을 던져 건설하려고 했던 반빈곤운동에 대한 그의 견해가 궁금했다. 특히 21세기 초입에 부산, 울산지역 철거민, 노점상 운동이 패배하고 빈민활동가들조차 생계문제로 떠나갔으며 윤웅태 동지도 빚을 청산하기 위해 막노동과 전국하역노조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삶을 꾸렸지만 2005년 무렵 그는다시 부산지역 반빈곤운동으로의 복귀를 결심하게 된다. 난 그 이유에 대해 오래도록 마음이 머물렀다.

화물연대나 운수노조 상근자로 활동을 했다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이곳에서 나름 운동의 전망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윤웅태 동지는 하루하루 생계와 활동비를 걱정해야 하는 그 자리, 좌우파를 막론하고 누구도 관심을 갖거나 조직하거나 연대하지 않았던 그 자리, 자본-정부에 의해 무자비하게 수탈이 진행되는 그 자리, 방어수단 하나 없이 오직 맨몸으로 국가폭력과 가난과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그 자리, 그는 마치 전태일 열사가 가난하고 어린 시다들 곁으로 돌아갔듯이 이 땅의 가장 낮고 가난한 사람들 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가장 낮고 가난한 사람들 곁에서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평의회운동을 조직하려고 했고 물이 고여 스며들듯이 가난한 사람들 곁에서 혁명을 꿈꾸었다.

그의 삶-운동에 대해 생각하면서 레닌의 전국적정치신문 노선을 따라 대공장을 중심으로 설계됐던 내 삶-운동을 되돌아보게 된다.(작년 화천으로 올라오기 직전에 오토밸리 교육장에 간 적 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에서 신규 조합원 교육을 위한 예행연습을 하는 자리였다. 현대자동차 1차 하청노동자들의 연봉이 5-6000만원 되는데, 노동자 임금 상위 14%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모든 사내하청의 정규직화", "불법파견철폐, 간접고용 철폐" 등 이 이후의 이야기가 운동적으로 중요한 것이었는데, 난 유독 노동자 임금 상위 14%가 귀에 박혀 버렸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구체적인 감각, 비판적 성찰로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위치가 뚜렸해졌다 내가 부정하고 싶어도 확인할 수 밖에 없는 것, 내가 해 온 운동이 노동자 임금 상위 14%의 운동이라는 것, 대공장 울타리를 넘어 "계급"투쟁을 조직하는데 실패했다는 것, 어느새 노동조합 관료제의 위성정치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 엄마-집 준공 검사가 끝나고 다시 울산으로 내려가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이다)

장례식장 추모제 때 대연우암공동체 손이헌 집행위원장은 "물이 고여 스미듯이 그는 우리에게 왔다", "윤웅태 동지가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했지만,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게 되면 내가 그를 함부로 할 것 같아 거부했다"

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윤웅태 동지가 활동가로서의 최고의 찬사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고 윤웅태 동지에 대한 최고의 존경을 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환갑이 넘은 분이 사십대 중반의 젊은 활동가에게 찬사와 존경을 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만큼 윤웅태 동지 운동의 깊이가 느껴졌다.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끈질기고 정기적이며 계급투쟁의 구체적인 역할을 집행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 운동의 동력-엔진일 것이다. 운동의 큰 엔진을 잃은 우리는 그가 혼자 감당했던 많은 과제를 여럿이, 함께, 나눠서 집행해야 하고, 물이 고여 스미듯 모든 계급 속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누구나 "모든 계급 속으로"를 외칠 수 있지만 물이 고여 스미듯 "모든 계급 속"에 가 닿을 수 없다. 이 사이에 우리는 운동의 위계질서와 차별의 장벽을, 비판과 토론을 억압하는 관료주의, 부르주아 정치를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물이 고여 스며들 듯 계급의 심장에 가 닿는 것, 이것이야말로 계급투쟁이 아닌가? 윤웅태 동지는 가장 낮은 곳의 가난한 사람들 곁에 투명한 맨 몸으로 섰고 그들이 그들의 투쟁을 스스로 시작할 수 있고 지속할 수 있도록 자기 생을 걸었다. 자신을 비워 놓음으로써 새로운 투쟁의 주체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장례식장에서 최고운 동지는 윤웅태 동지가 "화내는 기색조차 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고 그의 많은 벗들도 똑같은 증언을 했다. 난 놀라웠다. 간경화, 극도의 피로감이 윤웅태 동지의 몸을 짓눌렀을텐데, 그 많은 집회를 조직하는 것, 연대를 조직하는 일은 또한 무수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인데, 너무 피곤해 회의를 빨리 끝내고 싶기도 했을 것이고, 길어지는 술자리가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었으며 생각의 차이 때문에 짜증을 내거나 목소리가 높아졌을 수도 있었을텐데, 이 모든 과정에서 그는 화 내는 기색조차 내어 보이지 않았다니! 오히려 "달빛 같은 미소"로 동지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손을 잡아주었다니! 동지에 대한, 투쟁에 대한, 혁명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정성스러웠으면 그 극한 상황에서 달빛 같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을까?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버럭버럭 소리지르고 짜증내고 화를 냈던 내겐 윤웅태 동지가 정말 놀라운 사람으로 다가왔다. 그가 함께 했던 장애인들, 철거민들, 여성들, 성소수자들, 이 땅의 낮고 가난하고 아프고 서러운 이들은 윤웅태 동지의 달빛 같은 미소를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나 또한 그의 미소를 가슴 속 깊이 새겨 넣는다. 그를 따라 배우겠다고 다짐하며.

이 모든 놀라운 일들을 해내기까지 윤웅태 동지의 자기 헌신과 희생, 가난과 고독, 갈수록 무거워지는 생의 불안정성. 그가 마치 탑처럼 쌓아올렸던 담배꽁초와 라면국물을 안주 삼아 술로 견뎌야 했던 세월이 사무치게 내 심장을 찌른다.

하지만 혹독하게 아픈 그에게도 촛불처럼 다가온 희망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차갑게 굳어가던 그의 간에도 촛불처럼 스며든 따뜻함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건 장례식장 추모제, 솥발산 하관식 내내 눈물 짓던 최고운 동지가 아니었을까. 그의 표현대로 "용맹무쌍하고 생체에너지 넘치며 옳고 그름과 책임감과 자유로움을 겸비한" 최고운 동지와 함께 활동했던 7년의 세월이 윤웅태 동지가 생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대지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지금 화천 엄마-집엔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솥발산 하관식 때 눈이 흩뿌렸으나 이내 그쳐 무척 아쉬웠다. 엄마-집 마당에 솜이불처럼 소복하게 쌓인 눈을 걷어 윤웅태 동지에게 덮어주고 싶다. 고단했던 생, 이제 편히 휴식을 취하기를 기원한다.

덧붙임;
최고운 동지, 준공검사 끝나고 울산 내려가면 술 한 잔 하며 윤웅태 동지를 함께 그리워합시다. 그에게 궁금한 것이 많아요. 모든 그리운 것들은 생의 환절기를 견뎌낸 따뜻한 체온을 간직하고 있데요. 동지 힘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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