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웅 / 1969년생 / 플랜트 배관공


절망하기에도 지친 시간 속에 길이 있다

해방글터 4 1,304

 

 

감옥에서 나온 지 벌써 3개월

쉴 만큼 쉬었다

그러나 눈썹 밑을 파고드는 이 불안함은 무엇인가

활동은 온전하게 내 것이었는가?

칠순 아버지는 갈수록 술주정이 심해지고

아버지의 술주정을 피해 시간을 보내려던

칠순 어머니는 매일 양발 공장으로 출근한다

다섯 식구의 가장인 아내는 간호사,

오후 3시 병원으로 출근한다

아들 강욱이, 여동생 딸 민이

아내가 돌아올 때까지 아이들을 돌본다

돈 몇 푼 번다고, 부업을 그만두라고 해도

어머니는 한사코 양발 공장으로 출근한다

생활이 안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운동은 단순한 결의가 아니라

생활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고만고만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얼마나 많은 땀과 피로와 아이의 투정을 견뎌야 하는가

지하실에 털어 박혀 종일 술을 드시던 아버지는

기어코 물건을 집어던진다

벌써 이 고만고만한 삶에 지쳐 간다

생활은 자꾸 변명이 되어 간다

 

어느새 40줄에 들어선, 감옥에 몇 번 갔다 왔던 이형은

술을 몇 잔 들지 않았는데 벌써 혀가 꼬부라지고 있다

10여 년간의 활동,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어

 

- 가두에 대한 매력은 내 청춘을 소진시켰어. 투쟁의 전과全科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질 수 없었지. -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었어 - 기관지의 문필가들은 자신의 밥벌이를 위해 떠나갔고 전통은 수립되지 않았어. 난 - 가두투쟁의 기술만을, - 정권타도의  슬로건만을 앙상하게 기억하고 있을 뿐이야 - 부모님은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아내는 집을 나가고, - 보증금 100에 월 13만원.

 

정말 이런 게 아니었어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될지도 모르겠어

말없이 이형의 손을 잡는다

이형, 나이 사십에 더 비참한 것은

혁명을 꿈꾸지 못하는 거야

활동의 지울 수 없는 상처는

관념이 아니라

오직 새로운 실천을 통해서만 

온전하게

온전하게

넘어설 수 있어

 

일상의 우연한 계기가

내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들 강욱이를 데리고 지하철을 탄다

강욱이는 지하철 타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정리해고 반대, 서울지하철노동조합'

벽보가 떨어져 있다

사람들이 벽보를 지나쳐 간다

벽보를 지나쳐 가는 것은 내 삶을 부정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돌아서 떨어진 벽보를 다시 붙인다

눈썹을 파고드는 불안과 변명을 함께 떼어 붙인다

아들 강욱이가 머리띠를 묶은 노동자의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모둠발, 강욱이의 발목에 힘줄이 선다

떨어진 벽보를 다시 붙인다

 

아내는 다시 활동을 시작하려는 내게 두렵다고 한다

그래, 두려운 것이 사실이다

가족을 지키고 이 속에서 할 수 있는 일만 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진정 두려운 것은

싸움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이다

혁명을 꿈꿀 용기조차 없는 것이다

이 고만고만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얼마나 많은 피로와 땀을 견뎌야 하는가

절망하기에도 지친 시간 속에 길이 있다

 

가건물 같은 생활에 전혀 새로운 관계의 햇살 한 뼘 

들어찬다

노동조합 속에서 새로운 일을 찾은 아내는 웃는다

그래 이게 '내 삶이다'

잊고자 하는 패배의 기억으로부터 시작하는 내 삶이다

때늦지 않은 걸음으로

저토록 확실하게 피는 생활 - 혁명 속으로

내 마지막 삶의 불꽃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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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해방글터
가두에 대한 매력은 내 청춘을 소진시켰어. 투쟁의 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질 수 없었지
행에서, "투쟁의 에"가  "투쟁에"의 오타냐, 아니면, "의"와 "에" 사이에 무슨 단어(예를 들면 "결과"같은)가 빠진거냐? 수정 요망.
조성웅
오타, '투쟁에 대한' ...보내준 첫번째 시집이  완성본이 아닌 것 같아, <초봄이었다>도 첫 번째 시집에는 없거든 ㅠ 출판사에 넘기전 가편집본인 것 같네, 완성본이 어디에 있는지 찾지를 못하겠네, 암튼 올려 놓으면 천천히 수정할께
두 번째 시집부터는 완성본이 갔을거야 ㅎ
해방글터
오케.
해방글터
미안, 나한테 시집이 있어서 찾아 보니, 투쟁의 全科로 되어 있네. 이걸로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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