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웅 / 1969년생 / 플랜트 배관공


삶은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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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불안하다

 

몸이 너무 아파 무단결근 한 날

새벽까지 분노로 찌들다가 숙취에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무단결근한 날

오늘은 정말 일하기 싫어서 무단결근 한 날

하루 종일 불안하다

무엇을 해도 검은 그림자처럼 불안은 몸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굳어진 반장 얼굴은 공포다

다음날 출근 시간

사무실 앞까지의 발걸음은 천근만근이다 

반장에게 한 소리 듣고 나서야 비로소 속 편해지는

이 불안은 정신병이  아니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밥줄 끊겨야 하는 

두려움이다  

 

씨발, 담배 맛은 더럽게도 좋네 

 

중학교 다니는 아이가 있는 석수 형님이 

반장 앞에서, 동생들이 보는 앞에서

무단결근의 죄 값을 단단히 치르고 있다.

초등학교 아이가 선생에게 혼이 나듯

푹 숙여진 고개는 들리지 않는다

팀장도 손가락질을 하며 거든다

자꾸 이 딴 식으로 하면 함께 일 못한다

우리 석수 형님

뒤돌아서면서 

개새끼들. 정말 좆같네

씨발, 담배 맞은 더럽게도 좋네 

 

등판엔 온통 부항자국

 

월말 시급 계산서가 나오면 

모두들 이번 달 얼마나 일했나 목이 빠진다

일하는 소, 승훈이 형님 

모두들 야!  400시간이 넘네

이번 달 돈 좀 되겠는데

부러워하지만

목욕탕에서 본 승훈이 형님 등판은 온통 부항자국뿐

 

미포만은 말이 없다

 

용접공인 만석이 형님 

허리디스크로 산재신청을 하려고 할 때 

업체에서는 증인을 매수하여 산재를 못 받게 했다

일하다 허리디스크가 생겼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

중공업 박 부서장님 무재해 표창장 받고 이사로 승진해야 하기 때문

억울하고 분하고 서러워

우리 만석이 형님 업체 대표 앞에서 

산재 요구하며 독극물을 마셨다

하나 남은 목숨으로 산재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 현실

산재승인을 하면 전산 클레임에 걸려 중공업에 다시는 취업하지 못하는 현실

눈도 감지 못하고 쓰러진 만석이 형님이 마지막 본 미포만은 말이 없다

 

통제는 계속 된다

 

일 끝나고 파김치가 된 몸은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듯이 아프다

그래도 퇴근시간이 되면 하청 노동자의 몸은 기대감으로 달아오른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보다 

관리자들의 통제로부터 벗어났다는 해방감

그러나 막상 중공업 출입문을 나서면 갈 곳이 별로 없다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1차, 삼결살로 폐에 쌓인 분진을 씻어낸다

― 술기운이 달아오르고 고작 반장 총무새끼 욕하는 것뿐인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2차, 생맥주로 목마름을 가신다

― 아무리 하청이 좆같아도 그라인드공 최고라는 자부심이 자신을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인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3차, 노래방으로 간다

― 같이 몸 파는 주제에 좆 달린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삐삐 아줌마를 사는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4차, 룸으로 간다 

― 잔업이 사라지고 생활임금이 쟁취되는 그 날은 좋기야 좋겠지만 꿈일 뿐

관리자들에겐 말 못하고

관리자들에게 맞서 싸우지 못하고

얼굴이 벌게 가지고 부르는 소양강 처녀

 

지난 밤, 쏟아졌던 그 많은 분노들 

숙취 속에 사라지고

카드 값  갚기 위해 일요일 특근, 철야도 마다하지 않는다 

 

삶은 변한다

 

우리 집 3층에는 아내가 다니던 현대자동차 하청업체 소장이 살고 

그녀의 남편은 현대자동차 직영이다

집 두 칸을 터서 한 칸으로, 널찍하게 살고 있다

아내는 입사 초기 하청업체 관리자를 집 앞에서 보기가 껄끄러워 

소장을 피해 출퇴근해야 했다

 

언니라고 부르라고, 사근사근, 새콤달콤, 달짝지근 거리던 업체 소장

크리스마스이브 날, 성탄 선물처럼 아내에게 정리해고를 통보 했다

이렇게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지

업체 친구들과 집에서 보기로 한 날

소장은 친구들에게 일일이 전화 해

아내를 만나면 해고시키겠다고 협박했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

이 악물고 아내가 출근하자 소장은 이미 해고되었으니 나가라고 했다

“한 번 끌어내 봐라. 시체 치우게 될 것이다”

소장은 대, 소위원 지지 성명서를 받으려는 라인까지 따라와서 방해하려 했다

한 소위원에게 “쓰레기 같은 짓 하다가는 몰매 맞는다”

한 소리 듣고서야 사라졌다

소장은 예상과는 다르게 일이 커지자

“차라리 내가 그만 둘게, 제발 조용히 좀 있어라”

애원 반, 협박 반 썩어가며 악어의 눈물을 흘렸다

“구역질나니까 꺼져라”

 

우리 집 3층에 사는 아내 업체 소장은 

아내가 아침 출퇴근 피케팅 하러 나가는 시간을 피해 출근한다

한 날은 집 앞에서 만났는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미안하다”란 말과 함께 허겁지겁 3층으로 사라졌다

 

그렇다 

삶은 변한다

 

울산은 

 

울산은―노동운동의 1번지, 노동자 도시라고 하지

그런데 말이야

다 한 물간 옛날 얘기

이제 울산은 새롭게 규정되어야 한다

집주인은 직영

사글세를 사는 사람들은 하청

직영 특근 네 대가리가 하청 한 달 월급을 넘어서는 

1층과 3층의 높이만큼이나

직영과 하청은 생활적으로 갈라서 있다

하청은 직영들의 고용의 방패막이

울산은―이제 타락한 노동운동의 1번지, 노동자 분열의 도시, 노조관료들의 천국 

 

그러나 두드러지지 않지만 작고 조용한 싸움들

직영과 하청의 분리를 깨는 싸움들

관료적 통제를 깨는 싸움들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

다만 예전 보다 조금 더 힘든 조건,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돌아가지 않겠다

아니 돌아갈 길이 없다

투쟁 조건이 갈수록 힘들어지고

동지마저 떠나고

조합원들조차 침묵하고 있을 때

투사가 되는 법을 아는 것

부서에서, 라인에서, 과에서

말이 아닌 실천의 몸으로 일어서는 사람들

단결의 선들을 횡으로, 종으로 짜는 사람들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깃발을 올리는 사람들

― 이름을 조용히 부르면 부를수록 

내 몸은 따뜻해진다

우리는 함께 일하고 함께 밥 먹고 함께 성장 한다

이마 밖이 찢어져도, 피가 눈물처럼 흘려내려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몇 방울 꿰매고 곧바로 출근했다

인상부터 구겨지는 업체 총무새끼 낯짝 보기 싫어

산재, 아니 공상처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는 생각은 순종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지, 하청, 하청 주제에 억울하면 직영되지

 

업체에서 나온 비누각 세트 달랑 들고 고향으로 가는 발걸음 무거워도

의례히 하청이니까 참았다

목장갑을 빨아 끼고 찢어진 피스복을 테이프로 붙여 입어도 

의례히 하청이니까 참았다 

짤리지 않기 위해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알아서 기었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도 군소리 한 마디 못했다

조선업종 최고 호황 속에서도 다치고 골병들고 

정말 군소리 한 마디 못하고 개 값으로 죽어 나가는 하청 노동자들 

참는데는 도가 튼 사람들

 

참는데는 도가 튼 사람들 

그러나 이 죽음 같은 노동이, 숨구멍을 틀어막는 통제가, 이 절망 공장이 

우리를 변화시킬 것이다

하루하루 생각할 수 있고 분노하고 있으며 판단하고 

스스로 행동할 줄 아는 사람들

그렇게 봄은 거대한 고철 덩어리 같은 절망에 균열을 내며 왔다 

 

새싹들이 일제히 꽃을 피우 듯 

일당직 하청노동자들이 소급분을 받기 위해 일어섰다

정말 짤릴 각오를 해야 했고 처음에는 스스로를 믿지 못했다

조선소밥 처음 먹을 때처럼 조심스럽고 긴장됐다

그렇게 하청동료들이 많이 모일 줄 몰랐다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이 용접 비드처럼 연결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깃발처럼 탈의장을 점거하고 작업을 거부했다

스프레인 건에서 페인트가 뻗어나가는 압력처럼 소급분을 달라고 요구했다

 

업체 사장 놈 빼째라고 했다

직영 관리자놈들 업체 들어낸다는 협박을 했다

하청노동자들이 처음으로 뭉쳤다 끝까지 간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똥줄 타는 것은 업체 사장놈 직영 관리자놈들

“직영 새끼들 때려잡아 놨더니 하청 놈들이 뭉쳤다

일 커지게 하지말고 소급분을 줘라“

직영 관리자놈들이 먼저 손을 들었다

하청노동자들이 처음으로 뭉쳤다

생애 처음으로 자랑스러웠다

하청도 뭉치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체념을 넘어 쟁취한 우리의 소중한 성과

이제 우리는 더 높이 더 멀리 나아갈 것이다

 

하청노동자들이 처음으로 뭉쳤다 끝까지 간다

이제 저주스런 하청 노동자의 이름에 무덤을 판다

일어서는 하청노동자

일어서는 하청노동자의 전투적인 손은 

가장 먼저 단결을 배울 것이다

일어서는 하청노동자의 전투적인 발은 

가장 먼저 연대 위에 첫 발을 놓을 것이다

87년 노동자 대중파업으로부터 일어서는 하청노동자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일어서는 하청노동자

마침내 노동해방의 첫 노래로 일어서는 하청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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