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웅 / 1969년생 / 플랜트 배관공


후 기 / 제1시집. 절망하기에도 지친 시간 속에 길이 있다

해방글터 0 1,060

 

 

"이제까지 내가 쓴 시 보잘 것 없다. 내 나이 마흔 다섯, 이제 시작이다. 내년부터는 생활 속으로 들어가자. 거기 가서 끝간데까지 사랑하고 증오하자. 중용은 시가 아니다. 그것은 성자들이나 할 일이다. 시인은 성자가 아니다. 혁명하는 사람 그가 시인이다"(1990.10.29) 

- (김남주,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창작과비평사, 1995. p.204)

 

고 김남주 시인의 말씀은 90년대 내내 내 삶의 뿌리 깊은 질문이었다. "나무 끝을 나르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을 지나, "죽음 하나 같이 할 벗 하나 있음에 그것으로 자랑스러웠던" 투쟁의 절정을 지나, "사상의 거처" 마흔 다섯의 나이에 "이제 시작"이라니! "중용은 시가 아니"라니! "생활 속에서 혁명하는 사람 그가 시인"이라니! 내 호흡과 함께 할 화두. 난 선생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그 말씀 더욱 서늘해지는 새벽.

 

뒤늦게 시작한 운동이 한 차례 파산 나고 마지막으로 도망쳐 갔던 곳. 아버지의 방에는 차압 딱지가 붙어 있었다. 하루 20시간의 노동으로도 늘어가는 빚을 어쩌지 못했다. 끝내 아버지는 쓰러지셨다. 홀로 아버지의 방을 지키면서 아버지를 오래도록 생각했다. 그 땀과 피로와 벼랑으로 내 몰린 생활 속에서 나는 아버지와 화해했다. 퇴원한 아버지는 이틀이 지나기도 전에 일을 시작하려 하셨다.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아버지의 말씀은 간단했다. "내 일이다." 벼랑 끝의 진지, "내 일이다." 아버지와 함께 한 내 삶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나는 부드럽고 향기로우나 결코 나약하지 않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내 삶과 운동이 아버지의 말씀처럼 "내 일"이 될 때, 

"내 일"이 김남주 선생의 말씀처럼 "생활 속에서 혁명"이 될 때, 

나는 비로소 시에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이제 부끄러움도 하나의 자산이기에, 그리고 나의 시집이 당대 실천 - 투쟁의 작은 기록이라면 이 시집의 운명은 스스로의 길을 찾아 갈 것이다. 

 

함께 했던 동지들과 아내, 아버지 어머니의 방식으로 나의 활동을 침묵으로 지지 해준 부모님께 이 시집을 바친다.

 

 

2001년 4월

조 현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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