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웅 / 1969년생 / 플랜트 배관공


석진씨가 통증 깊게 말했다

조성웅 0 1,022

 

 

박근혜씨가 구속되는 날

공장 담벼락 한 편에 홍매화가 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매혹이 위로가 되지 않은 시간이다

난 꽃봉오리 앞에서 서툰 예감보다는 뿌리로 돌아가는 긴 도정을 생각했다

 

내 몸에 새겨진 그라인더의 진동 속에는 어떤 의미 있는 계절도 도래하지 않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경쟁을 허용하면서도 아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나의 사십대는 타락하지 않기 위해 싸웠던 나날이었다

多中에 대한 사유 없이는 전망이 열리지 않았다

이뤄놓은 것 하나 없지만 그래도

내게 평등에 대한 예민한 귀가 있다는 것이 어느 날 위로가 됐다

 

정권이 바뀌자 하청업체 관리자들이 먼저 미쳐 날뛰기 시작하고

난 그들에게 인간이 아니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더욱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됐지만

여전히 내 마음이 쏠리는 건

낡은 안전화며 다 헤진 목장갑이었다

경쟁을 견뎌내느라 낡고 헤진 마음이여

과연 경쟁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쓴 마음이여

난 공감에 이르는 바닥에서 바닥으로 살겠다

 

*

 

지각한 석진씨는 업체 반장에게 한 소리 듣고 와서도 질문을 놓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는데 정말 죽을 것 같더라고요

성웅씨가 더 힘들어할까봐 억지로 출근했어요

성웅씨,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겨? 일하기 위해 먹고 사는 겨?”

먹고 사는 문제와 일

난 석진씨 질문의 바깥을 고민하다 답변할 때를 놓쳤다

 

놀 수 있을 때 어떻게든 더 놀고 싶은 나는

일할 수 있을 때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벌려는 석진씨의 마음을 조용히 헤아려보고

잔업 하라는 소리에 표정부터 어두워지는 나는

잔업 한다는 소리에 표정부터 밝아지는 석진씨 눈빛 곁에 내 마음을 가만히 내려놓는다

 

(변변찮은 내 체력은 견디지 못하는 시간까지 이를 악물어야 했다

하루 4시간 노동은 그런대로 버티겠는데 6시간이 넘어가면 온 몸이 아프다)

 

아픈 몸으로 석진씨와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홍매화가 열어 놓은 쪽부터 해가 지기 시작했다

질문을 시작하는 시간이다

정권도 바꿔냈는데 주말 다 쉬고 하루 6시간 일해도 먹고 살 수 있어야죠

이젠 상식이 되었으면 좋겠네요라고 석진씨가 통증 깊게 말할 때

홍매화 향기가 번져 저녁노을을 낳고 있었다

대화가 산란되는 시간은 참 붉었다

모두 붉은 중심이었다

난 석진씨 지친 어깨 위에 내 손을 올려놓으며

100년 전 하루 6시간 노동일 쟁취를 내걸고 싸웠던 러시아의 노동자들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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