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웅 / 1969년생 / 플랜트 배관공


위험에 익숙해져 갔다

조성웅 8 2,275

 

끝내

그는 H, 그 위태위태한 난간에 모로 누워 버렸다

그의 등 뒤에는 10M 허공이 펼쳐졌다

 

가장 위험해 보이는 자세가 그래도 용접을 하기엔 최선의 자세

그는 허공조차 안전지지대로 사용하는 법을 안다

 

몇 차례의 죽음을 건너

오늘 하루분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까지

 

오로지

위험에 익숙해져 갔지만

 

그는 이 야만의 세계

삶의 안전을 위한 최고의 역능을 숙련했는지도 모른다 

 

H빔 위태위태한 난간에 모로 누운 그의 모습이

목숨을 살리는 방법 같고 삶의 안전을 위한 끈질긴 질문 같고

이판사판 한 번 붙어 보자는 고공농성 같았다

허공은 모로 누운 그의 모습을 닮아 수평을 이루었다

2016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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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박상화
일하는 게 투쟁이고, 투쟁이 삶 자체인 바닥의 삶.
가난한 사람들은 매일이 전쟁이다. 매 순간 안전의 사각지대에 서서 먹고, 일하고, 사랑하고 아이를 키운다.
언제 어떻게 다치고, 죽을 지 모르는게 그들의 삶이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늘 핏발이 서 있고, 예민하고, 격할 수 밖에 없다. 누구나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 놓이면
핏발이 서고, 예민하고 격할 수 밖에 없다. 위험앞에선 동물들이 온몸의 털을 곤두 세우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가난하다는 것은 늘 그렇게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고 살아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따로 투쟁이 없다. 따로 광장이나 거리에 나가 타도를 외칠 짬조차 없다. 일상이 그냥 자본주의와의 투쟁의 연속이다.
낙수효과라고 떠드는 데, 대기업에 퍼주면 돈이 돌아 저 바닥까지 흥건히 젖을 거라는 이론이다. 그러나 대기업에 돈을 퍼주면 거기서 고이고 말지, 아래로 흘러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자본을 바탕으로 더욱 심하게 쥐어 짠다. 그래서 대기업에 돈을 퍼줄수록 아래로 내려가면 더 무거움을 느낀다. 프레스효과라고 부르고 싶다.

요즘 좌우가 대동단결하여 신이 난 언론을 보면서, 저들이 양떼를 몰듯 민중을 몰아가 이룩하는 투쟁의 열매는 누가 따먹을까를 생각한다. 그게 낙수효과처럼 민중에게 돌아갈까를 생각한다. 그게 혹시 더 무거운 프레스로 민중에게 돌아오지 않을까를 생각한다. 절차와 제도는 언제든 잇었으나, 그것은 한번도 민중의 칼이 아니엇고, 모든 전쟁은 가진 자들의 싸움에 동원된 민중의 피였다. 민주주의니 삼권분립이니 하는 것도 좀 더 세밀해지고 교묘해지고 무거워진 신종 프레스의 등장이었을뿐임을 생각한다.

정권을 좌가 잡건 우가 잡건, 누가 잡아도 바닥은 항상 잇지 않겟는가. 그리고 그 바닥은 항상 눌리지 않겠는가. 당장 동지라고 부르는 사람들끼리도 싸우고 갈리는 이유는 그들의 시선이 평등을 향해 있지 않고, 권력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에 있지 않고 권력을 향해 잇기 때문이다. 자신이 권력을 잡아야만 세상은 평등해진다고 믿는데, 그런 사람들일수록 세상이 어떻게 평등해져야 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대야에 흙물을 넣고 가만 두면 맑은 물과 흙가루가 나뉜다. 휘저으면 흙물이 된다. 세상이 평등해지는 방법은 두가지 뿐이다. 흙을 거름종이로 걸러내던지, 계속 휘젓든지. 거름종이가 제대로 작동을 못하는 것을 게이트라고 부르고, 고쳐야 한다고 언론은 침을 튀기지만, 정작 걸러지는 건 늘 가난한 흙들 뿐이다. 그렇다고 계속 휘저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계급지어져야만 하는가.

삶이 투쟁이고 삶이 이판사판 고공농성인 사람들이 안전에 익숙해져가는 것이 아니라, 위험에 익숙해져 가야만 살 수 있는 것을,
누가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이 시를 읽으며, 나는 그것이 고민이다.
조성웅
나도 이 시를 쓰면서 그것이 고민이다.
그것이 10만이든, 백만이든,
제헌은 실생활의 변화이어야 한다
오로지 안전에 익숙해져가는, 행복에 익숙해져가는, 웃음에 익숙해져가는, 춤과 놀이에 익숙해져가는
실생활의 변황이어야 한다
이것이 촛불의 내부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 시,
죽음과 맞서 싸우면서 오늘 살아남은 이 사람이 고민인 것이다
과연 실생활의 변화는 지금 가능한가?
안전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그는 공장의 명령의 제도를 넘어서야 하고 노동조합의 관료주의를 넘어서야 하고 마침내 경쟁이 중지되기까지 그의 고공농성을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이 사람이 고민인 것이다.
조성웅
고민하다. 이미 그는 이 세계를 충분히 운영할 수 있는 역능이 충분히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 정도을 고통을, 이 정도의 위험을 견딜 수 있는 노동자라면 탄핵 이후의 세상도 충분히 운영할 수 있는 역능이 있다는 생각
그래서 오늘을 이 정도까지 퇴고해봤다
박상화
좋다, 더 좋아졌다.
조성웅
자다 벌떡 일어나 마지막 연을 다시 수정했다
계속 마지막 연의 낭송이 불편했거든
다시 디비 자야겠다. 한 서너시간 자고 일어나야는데 ㅠ
박상화
마지막 줄 좋다. 자꾸 더 나아가서 좋다.

처음엔 그저 위험한 용접공의 이야기를 고발하는 것에 그쳤는데, 자꾸 내용이 깊어지고 능동적이 되어간다. 불안한 노동에서 맞서 싸우는 노동으로 시의 세계가 변하고 있다. 안전하지 못한 작업에 대한 슬픔에서 적극적인 고공농성을 이끌어 내고, 드러누워버린 불안을 수평으로 기준 맞추었다. 그 끈질긴 삶의 태도에서 안전한 삶으로의 진행을 끌고갈 힘을 본 것이며, 보이고 있다.

이 긍정성을 혹자는 억지적 낙관이나 글의 미화성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노동의 수고가 어떻게 노동자의 저력이 되는지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낙관이나 미화가 아니라 실질적인 힘이라고 본다. 허공에 드러누워 작업해야만 하는 용접공의 삶과 그것을 버텨내온 힘은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싸움을 길게 끌고갈 저력이 될 것이다. 그 저력을, 시인은, 목숨을 살리는 방법이자 끈질긴 질문으로 만들고 이끈다. 현실은 그를 기어이 고공농성까지 몰아가지만, 그는 허공과 수평을 이루고 이겨낼 것이다. 그 힘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이 한줄에 걸렸다.

그는 허공조차 안전지지대로 사용하는 법을 안다

절창이다. 이렇게 괴로운 노동, 불안한 노동, 힘겨운 노동을 긍정적으로 끌어내고, 드러나지 않은 힘들을 꺼내어 증명하는 시가 정말 필요하다.

노동자가 노동하고 싸울 동안, 시인은, 노동자가 가졌으나, 가진 줄 모르는 힘들을 꺼내어 보여주고, 그 힘을 노동자의 연장으로 쓸 수 있도록 함께 발맞춰 걸어야 한다. 그것이 시인의 연대다. 곁에 앉아 함께 싸우고 함께 깨지는 것도 연대지만, 시인의 연대는, 노동자가 모르는 자기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 보여주는 데 있고, 노동자가 모르는 숨겨진 그 힘들을 꺼내어 보여주는 데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노동자들도 자본에 세뇌당하여 부지불식간에 가진 자본적 행동, 좌절, 폭력, 비난, 욕심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어릴적부터 족쇄를 걸고 맞고 자란 코끼리가 어른이 되어서, 힘이 있는데도, 족쇄가 없는데도, 여전히 사육사에게 주눅드는 것과 같다. 자기가 사육사가 되어 다른 코끼리를 핍박하면서 자본가 흉내를 내고 잇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너는 힘이 있고, 족쇄도 끊어낼 수 있으며, 너의 동족은 자본가가 아니라 다른 코끼리들임을 보여주는 것이 시인의 할일이다. 그러러면 이 시처럼 긍정의 힘, 숨은 힘을 끌어내어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인간은 익숙해지는 존재다. 적응하는 존재다.

하향적응은 슬프다. 2백만원으로 살다가 백만원으로 살다가 오십만원에도 산다. 정규직이다가 하청이다가, 게약직으로도 산다. 자꾸 바뀌는 환경에 적응을 한다. 적응을 안하면 시스템을 그렇게 만들지 못할텐데, 아무리 개차반 시스템을 만들어도 인간응 제 몸을 분질러가면서까지 적응을 한다. 주어진 좀 더 좁은 틀에 내가 맞추는 것만이 가족을 먹이고 사는 유일한 길이라 철썩같이 믿는다. 그 적응의 의지는 굶어 죽는 날까지 계속된다. 무서운 힘이다.

상향적응은 보다 인간답다. 좀 더 안전해 지면 더 안전해 지고 싶어지고, 파업이 위력을 발휘하면 그제서야 휘두를 연장이 잇음을 깨우친다. 그러한 상향적응을 한번만이라도 느껴보면 하향적응을 하지 않게 된다. 

이 익숙함, 익숙해야 안전하다고 느끼는 본능을 상향적응으로 가도록 발맞추는 일, 그것이 시인의 관찰이고 고민이어야 한다. 상향은 자본적 소득의 증대, 권력의 증대, 여가의 증대가 아니라, 시선의 확대, 연장의 확대가 되어야 한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새로움을 갖고 그 새로움으로부터 힘을 갖는 것, 가지고도 몰랐던 힘을 꺼내 연장으로 쓸 수 있는 것, 둥근 땀이 연장이 되고, 허공이 안전지지대가 되는 일이 그렇다.
붕어
성웅형 시를 읽으면 제 시가 초라해 보여요...ㅜ.ㅡ
그냥 감상 나부랭이? 같은....
삶의 문제겠죠...
조성웅
서로 긴장하고 서로 격려하며 그렇게 함께 살아가야지
마치 상화와 나처럼
엄마 곁에서 시 한 편도 쓰여지지 않았을 때, 속은 타들어갔을 때, 어느 봄날이었던가?
상화의 <춘묵>을 읽으면서 나도 시를 쓰고 싶다, 고 생각했지.
이건 초라함이 아니라 어떤  설래는 긴장 같은 것, 위로 같은 좋은 자극이었어
난 흥렬과 호흡이 다르고 결이 달라. 그래서 난 죽어도 흥렬 같은 시는 못써
다만 난 흥렬과는 다른 나의 개성에 몰입하지. 

초라해진다는 건 자신감이 없다는거야.
넘 따라 하지 말고 난 내 몫의 시를 쓰는 거야.
나보다 뛰어난 시인들은 너무 많지만, 어차피 열등감은 시인의 자질 중에 하나지만
난 그들과는 다른 내 몫의 시에 대한 어떤 자부심, 포기할 수 없는, 자본주의와는 다른, 지금 이곳에서의 전망에 대해.

가만히 자신을 들여다보는거야. 그 숨결을 느껴보는거야. 그 숨결이 규동의 개성일 것이고 그만큼 자부심을 갖도록, 건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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