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웅 / 1969년생 / 플랜트 배관공


햇살 한 뼘 담요(완성)

조성웅 4 1,883

 

울산 용연 외국계 화학공장에 배관철거, 수정 작업 나왔다

기존 배관 라인을 철거하는데 먼지가 일 센티미터 이상 쌓여 있었다

변변찮은 일회용 마스크 하나 쓰고 먼지구덩이에서 일을 하다 보면

땀과 기름때로 범벅이 된 내 생의 바닥이 드러났다

 

마스크 자국 선명한 검은 얼굴로 정규직 직원식당에 점심 먹으러 가면

까끌까끌한 시선들이 목구멍에서 느껴졌다

 

기름때 묻은 내 작업복이 부끄럽지는 않았으나

점심시간 어디를 찾아 봐도 고단한 몸 쉴 곳이 없었다

메마른 봄바람이 사납고 거칠었다

흡연실에서 담배 한 대 물고 버티는데

축축해진 몸에 한기가 들었다

 

흡연실 쓰레기통 옆이 그런대로 사나운 바람도 막아주고

햇살 한 뼘 따뜻했다

 

함께 일하던 이형이 쓰레기통 곁에 쪼그려 앉아 담배 한 대 피고 나더니

몸을 오그려 고개를 숙였다

이내 코고는 소리가 쓰레기통에 소복이 쌓였다

난 그의 곁에서 오래도록 아팠다

 

안정도 지금 그를 안내할 수 없고

행복도 지금 그를 도와줄 수 없고

코뮤니즘도 지금 그를 격려할 수 없었다

 

쪼그려 쪽잠 자는 그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꿈조차 꾸지 못하는 그의 고단한 몸을 깨우지 않는 것이었다

햇살 한 뼘조차 그늘지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난 햇살 한 뼘, 담요처럼 덮어주고 싶었다

 

가진 것 하나 없어도

가진 것 하나 없는 맨 몸으로 도달한 투명한 수평,

햇살 한 뼘 담요!

201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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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박상화
언 몸을 녹일 땐 체온이 가장 좋다고, 따뜻한 여인이 언 사내의 몸을 녹이는 장면이 영화에 심심찮게 보인다.
어릴 땐 야하게만 보았던 그 장면이 이 시에 겹쳐진 건 이제 야한 것보다 더 사내의 몸을 달구는 것이 있다는 걸 알게된 나이라서 인가보다.
"가진 것 하나 없는 맨 몸으로" 지치고 언 사내의 몸을 녹여주는 햇살의 은혜로움이야말로 정분날 만큼 사랑스럽고 고마운 것이 아닐까 싶다.
사극에서 사모하는 사람을 말할 때 '은혜한다'고 했지. 사랑이 깊어 고맙고 고마운 거겠지.
햇살처럼. 사람이 사람에게. 가진 것 없이도 사랑을 품게 할 수 있는 마음이 저 햇살처럼 덮어주고 싶은 담요의 마음일 것이다.
그 마음으로 이루어진 수평이라면 얼마나 아름답고 강력한 힘이랴.
모든 걸 가지지 못했지만, 언 사내를 덮어주고 싶은 마음 하나 가졌다면 다 가진 게지.
다만, 준만큼 받기를 바란다면 감정은 배신감이니 분노같은 것들로 사람을 흔들어 놓기 일쑤지.
준 만큼 보람도 못 갖게 하는게 감정이라. 
햇살처럼. 햇살 담요처럼. 주고 말면 그 뿐인 그 마음이 진짜 수평이겠지. 진짜 사랑이겠지.

나는 요즘 그 순한 마음에 관심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정말 타고난 자본이 없어서 가난한 걸까?
학력이 부족해서, 부모가 가난해서, 자본이 없어서. 그런 것들이 한 이유가 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똑똑하고 말잘하고 약삭빠른 사람들은
출신에 관계없이 언제나 누군가의 등을 밟고 계단을 오르더라.
더 많은 돈을 벌 수도 있는데 늘 등을 대주고 낮은 곳에 몸둔 사람들은 순한 사람들이더라.
사람의 도리를 존중하고 제가 손해보더라도 남을 밟지 못하는 사람들.
말이 어눌하기도 하고, 규격화된 학교 공부가 재미없고, 생각도 느려서
한참을 생각하고 곱씹어 보고야 아, 이렇게 할 걸! 하는 사람들.
그런 착한 사람들을 이 사회는 무능하다하고 바보라고 한다. 그래도 우선은 히히 웃고 보는 사람들.

세상이 공평해 지려면 그렇게 늦고 느리고 눈치없는 사람들이 불이익 받지 않는 규칙이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잘 사는 사회가 바른 사회겠지.
어떤 조직이건 사람들은 나뉘지. 돈으로도 학벌로도 나뉘지만, 결국은 눈치빠르고 똑똑한 사람들과 느리고 늦은 사람들로 나뉠거야.
운동권이라 하는 조직에서도 느리고 늦은 사람들은 구박받고 밟히기 일쑤겠지. 중요한 건 지금시점에서 적을 어떻게 하는 거라며, 그런 빠른 눈치를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배려하고 보호하는게 아니라 소모되고 버려지지. 그러니 회사라든가 정치권이라든가 자본가들의 조직에서야 더 하겠지. 약자를 밟고 일어서는건 미덕인 사회니까.

가난도 나뉘고, 비정규직도 나뉜다.
그러나 언제나 그 바닥에 고이는건 느리고 늦고 순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늙고 갈 곳없는 사람들이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 혁명은 언제나 엘리트 계층의 주도로 일어났지. 그리고 순하고 느린 사람들은 혁명이 일어나도 다시 바닥이었지.
그런데도 그 순한 사람들은 그 순한 마음을 지켜왔고, 그 순한 마음은 저 조그만 햇살담요처럼 작지만 따뜻하고 은혜로운 것이지.
어떡할거나. 혁명은 날마다 일어나고 잇는지도 모르는 자본주의 사회, 숨가쁘게 엘리트들끼리 뒤집고 부칠때,
저 조그만 햇살같은  마음을 지키는 사람들을.
언 사내와 햇살이 보여주는 그 수평의 의미야 말로 사람들이 꿈꾸는 세상의 초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질적 풍요와 여유와 먹거리, 입거리로 따져도 개보다 뒤에 줄 서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
개처럼 꼬리를 흔들지 않으면 누구든 개보다 뒷줄로 갈거라는 협박이 온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에
무엇부터 바꾸고 체계화해 나가야 하는지
그 고민이 문인의 것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싶다.

이 시, "햇살 한 뼘 담요"가 그래서 조성웅의 시야를 넓힌 시로 가게 되지 않을까 싶다.
내 마음대로의 오독이었다면 이 주절주절을 용서하기 바란다.

싸우는 사람은 아프지 않는다. 그렇더군. 감기 걸려본지 삼년도 넘은 것 같다. 나도 너도 싸우는 것이다. 우리를 압박하는 권력이라든가
자본이라든가 여유롭게 살게 놔두지 않고 못살게 구는 삶으로부터.
시를 읽으며 나도 졸며, 쓰레기통 옆에서 게으르게 보란듯이 게으르게 사는 꿈을 꾼다.
조성웅
폭발하듯 쏟아지는 글을 보면서 네 한의 깊이를 가늠하느니
사실, 무너져내리는 시간 속에서도 내가 억지로라도 시를 쓰고 있는 건 싸우고 있는 너를 격려하기 위한 것이고,
더불어 해체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다.
힘내라 흥렬아, 그리고 고맙다.
조성웅
난 상화 보다는 네 본명인 "흥렬"이 더 좋다
자, 박흥렬 시인
한 잔 받으시게 ㅎ
박상화
그룰까, 그럼? 한잔 따라 볼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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