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웅 / 1969년생 / 플랜트 배관공


(편지글)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1, 2

해방글터 5 2,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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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엄마를 맘 편히 보내드려야 할 때, 이제 제 살 궁리를 해야 할 때, 엄마에게 편지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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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1

1. 엄마, 제 속이 타들어가는 정성이었던 엄마-집이 무섭도록 낯설어졌던 이유는 엄마가 없는 빈집이었기 때문이예요. 엄마 없는 빈집에서 제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집 마당 툇마루에 앉아 단풍 들어가는 잣나무 숲을 멍하니 바라 보거나 죽음 같은 어둠을 응시하는 것이었어요. 단풍이 들었으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었고 가을을 빠져 나와 입동까지 바람이 불었으나 그 기척을 들을 수 없었어요. 너무 아픈데 아픈 것도 몰랐어요. 

엄마 사구제 날, 엄마 목숨 가지고 날 협박하던 아버지가 술 취해 자기 목숨으로 날 협박하더군요. 아버지를 상주 갈가실 가족납골당에 다시 데리고 가 내리게 하고 그냥 버리고 화천으로 올라왔는데, 꾸역꾸역 엄마-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버지를 보면서 엄마 죽인 가해자 불한당 조씨를 나더러 어떻게 하라구, 하는 원망 썩인 맘도 들었지만 그래도 엄마 고마워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참 복잡한 감정이예요. 죽여버리고 싶기도 하구,  짠하기도 하구. 아버지와 관계를 잘 맺어 보려 노력하는 건 엄마 속 깊은 맘을 헤아리는 것이나 통제할 수 없는  분노가 불쑥 불쑥 올라오는 건 아직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럴때마다 제 정신이 쑥대밭이 되요.     

2. 넋이 나가 있다가 사구제 무렵인가, 아님 입동 무렵인가 잘 모르겠어요. 숙취에 무거운 몸으로 오전에 일어났는데 '일어나서 살림하고 싶다'는 엄마의 소망이 번개처럼 생각났어요. 정처 없이 가을 내부를 떠돌기 위해 강릉쪽으로 운전대를 잡다가 다시 화천으로 돌아왔던 이유이기도 했어요. 엄마가 살림할 수 있게, 엄마 깃들 수 있게 엄마-집을 완공해야겠다는 것, 내 의식 깊은 곳에 있었던 것 같아요. 

약수터, 물탱크, 보일러실도 마무리 해야 하고 붙박이장을 비롯한 장도 짜야 하고 준공검사 준비도 해야 하구, 그래 성웅아 정신차리자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무거운 맘-몸 다독였어요.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더군요. 왜 그렇게 일이 꼬이던지요. 나쁜 일은 몰아서 닥친다고 했나요. 고개 넘어 오는 도로와 집 뒤 자연 배수로 공사가 허가 범위를 벗어나서 지적공사에 용도변경 신청도 하지 못했어요. 준공검사 시작도 못하고 초조해졌죠. 다시 방법을 찾고 허가 범위 밖의 땅을 전용하기 위해 지분 있는 사람들 동의를 구하기 위해 서울까지 가서 도장을 받아야 했어요. 그렇게 두 달을 허비했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영농법인과의 불화도 발생했어요. 약수터와 장을 짜야 하는 엄마 주치의인 돌쑥 형도 엄마 가신 후 많이 힘들어 했어요. 엄마 돌아가시기 전 날 공사했던 약수터가 세 달이 지나도록 그대로예요. 마음이 동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제가 해 줄 수 있는 배려였어요. 그렇게 겨울장마가 찾아왔어요. 하필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겨울 장마가 내 가장 힘들 때, 엄마-집에 도착해서 오래도록 머물렀어요. 시간은 흐르지 않고 질척거리다 정지되더군요. 정지된 것들은 어찌할 바 모르는 막막함이었고 이 곳에 고인 정처 없는 불안이기도 했어요.  

3. 엄마, 오늘 엄마 유골함에 오래도록 손을 얹고 있었는데 마음이 착 가라 안고 맘이 편해지더군요. 엄마, 고마워요. 문중 모르게 납골당에 가짜 유골함 넣어 놓고 엄마 유골함 화천으로 모신 것 너무 뭐라지 말아요. 외삼촌이 화장터에서 "누나는 파랑새가 되고 싶다"고, "파랑새처럼 자유로운 삶을 꿈꿨다"고 처음 들었어요. 왜 제게 이야기하지 않아어요 ㅠ 그래서 전 엄마가 가부장 문중 정치의 그 형식에 답답하게 갇혀 외로워지기를 바라지 않았어요. 아버지에게 화천으로 모셔오자고 제안했고 흔쾌히 동의하더군요. 나중에 아버지 돌아가시면 엄마 유골함과 함께 납골당에 모신다고 약속도 했구요. 엄마가 그랬잖아요. '니 아버지는 살살 달래야 한다'구요. 아버지 돌아가시면 함께 납골당에 모신다는 건 엄마 말씀처럼 아버지를 살살 달래는 말이었어요. 사실 전 엄마-집 뒤 잣나무 숲 중앙에 짱짱하게 서 있는 소나무 아래에 엄마 유골을 뿌리고 싶어요. 어차피 동생들 화천 집에서 명절 지내게 될텐데 가까이서 동생들이나, 손주들이 엄마 한 번 더 보는 게 좋지 않겠어요. 

4. 근데 엄마, 엄마가 파랑새가 되는 건 아버지를 살살 달래고 아버지 밥상 차리는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단절하는 거에요. (제가 누누히 이야기했잖아요. 아버지와 이혼하라구) 겨우 일 년에 두 번, 저 집에 오면 우야든 절 더 먹이려구 안달하는 것으로부터 단절하는 거예요. 이제 제게 네가 제사 음식하구 술상 차리라구 이야기하는 거예요. 맛을 느끼는 관계의 평등함을, 그 정성스럽고 손맛 나는 음식에서 빗어지는 즐거고 웃음 환한 관계를! 그래요 엄마, 파랑새가 되는 건 가부장적 굴레로부터 파업하는 거예요. 아들에게 몇 번은 들어봤던 파업을 하는 거예요. 엄마! 엄마가 소망했던 파랑새, 엄마 며느리 위여사에게 제가 할께요. 제가 아버지를 쏙 빼닮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습성과 싸우면서 죽는 날까지 변화할께요.   

5. 엄마, 이제 이 곳이 무섭도록 낯설지도 않고 그렇게 막막하거나 불안하지도 않아요이제 막 아늑하고 편안해지기 시작했어요. 엄마가 남겨 준 이 유산에 대해 곰곰 생각하고 있어요. 

엄마, 아스타팜 없는 송명섭 막걸리 두 병 까고 백화수복 서너 컵 마셨더니 취기가 막 올라오네요. 

내일 술 깨면 하고픈 이야기 다시 쓸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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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2


1. 엄마 이 곳 화천은 영하의 날씨예요. 돌쑥 형은 겨울이 겨울답지 않다구 걱정도 하는데 엄마의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전 오래도록 한기였어요. 

어실어실 한기 든 몸으로 절정의 단풍도 다 놓치고 서늘한 슬픔이 순백으로 집 마당에 쌓일 때까지 정처 없었어요. 엄마가 보시기엔 참 용쓴다 하실 것 같아요. 

하지만 전 제 한기 든 몸이 빨리 데워지기를 바라지 않아요. 어떤 일이든 그에 맞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노자가 "비어 있어야 쓸모가 있다"고 했듯이 최근에야 엄마를 맘 편히 보내드리는 것이 엄마를 오래 기억하는 방법이라는 걸 이해하게 되요. 엄마도, 엄마-집도 마음이 쏠려 매달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이미 가 버린 엄마 잡으면 놓치는 것인데, "텅 비어 있어 충만함"의 어떤 경지를 아직 이해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떤 느낌은 있어요. 엄마!   

2. 엄마, 내일은 지적공사에서 나와 용도변경을 위한 분할측량을 할 거예요. 지적공사에서 측량한 성과도가 나오면 이제 본격적인 준공검사(복구준공, 개발행위준공, 건축준공)가 시작되요. 참 우여곡절도 많고 그만큼 시간이 지체됐지만 특별한 일이 없을 경우, 2월 중에는 엄마-집이 준공허가가 떨어지고 도로명 주소가 나올거예요. 엄마가 걱정하셨던 무허가 건축물이 아니라 허가된 집이 되는거예요. 엄마 맘이 좀더 편해지실거라 생각해요. 준공 허가가 떨어지면 법인과의 불화, 돈 문제는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방법을 찾아야할 것 같아요. 

3. 좀더 엄마 곁에 있고 싶지만 그러지 못할 것 같아요. 구정 무렵에 울산에 내려갈 생각이예요. 구정 무렵에 준공허가가 떨어지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필요한 행정적인 절차와 서류 준비해 놓고 돌쑥 형이나 좌웅씨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큰 문제는 없을거예요. 

4. 이제 울산에 내려 갈 준비를 하면서 엄마가 제게 남긴 유산을 곰곰 생각하게 되요. 

4-1. 무엇보다 내지르기만 하던 제게 엄만 '곁의 정치'를 가르쳐 주셨어요. 젊은 날, 전 쥐뿔도 없으면서 '지도'란 단어를 입에 달고 다녔어요. 좀처럼 지겹지도 않았어요. 어떤 자부심같은 것이기도 했으나 붉은 노을처럼 지도되는 것은 없었어요. 단풍이 붉어지는 이유 또한 스스로 그렇게 행하기 때문이었요. 

제 쉰 목소리는 곁을 내어준 적이 없었다는 것, 고독 따위는 무섭지 않았지만 제 등 뒤에선 적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죠. 제 청춘은 권력의지로 밖에 달리 제 자신을 표현할 방법을 몰랐어요. 곁은 장악 할 목표가 아니라 자기 생을 고스란히 내어줌으로써 서로에게 깃들게 하는 끊임 없는 생성과 치유의 도정이라는 걸 엄만 제게 가르쳐 주셨죠. 지도가 아니라 조력자로서의 삶이 엄마가 제게 가르쳐 준 곁의 정치에 더 어울리겠죠 ㅎ .
 
4-2. 어느날, 역사드라마를 보던 엄만 제게 "지금까지의 역사는 지 배때기 불리려고 서로 뺏고 죽이는 피투성이의 역사였다. 웅아 너는 저리 살지 말아라"고 말씀하셨어요. 전 엄마가 공산주의자 당 선언도 읽지 않았는데 저리 말씀하셔서 놀랍기도 했어요. 그래요 엄마, '지 배때기 불리려고 서로 뺏고 죽이는' 짓 하지 않고 모든 억압과 착취, 수탈에 맞서 싸우는 삶을 살아갈께요.  

4-3 제작년 가을 학교 가기 싫어하는 장손 문성이 꼬드겨 현장학습 신청하게 하고 강원도 화천에 데려왔는데, 엄마 기쁘게 하려고 데려왔는데, 오히려 엄마는 손주의 안부보다 먼저 "시집 나왔다더니 가져왔니"라고 물어보셨죠. 고마워요 엄마. 

전 엄마 곁에서 제게 보낸 엄마 편지를,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엄마 편지, 그 맑고 따뜻한 눈물, 엄마의 마음을 읽는 것이 참 좋았어요. 그 중에서도 군대 있을 때 제게 보낸 편지인데, 제 시의 뿌리가 여기였구나, 이 때 알았어요. 

"너의 시도 읽어 보구 싶구나.
틈나는데로 공부도 열심히 하여 웅이가 늘 말하듯이 등단하기 바란다.
너의 희망이 열매를 맺기를 축원하면서 엄마는 늘 마음으로 빌고 있다
푸짐한 문예창작의 밭을 일구어라"

예 엄마, 
'푸짐한 문예창작의 밭을 일구는' 혁명하는 사람, 시인으로 살겠습니다. 

2016년1월12일

아들 성웅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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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해방글터
나중에 보고싶을 때 언제든지 꺼내어 보라고 허락없이 이 글을 여기에 올린다. 나중에 이 편지글이 기억나 다시 꺼내볼 때, 너의 글이 너에게 힘이 되기를 바라면서.
조성웅
아주 어렵게, (술도 많이 먹어야 했구) 엄마에 대한 말문이 트인거야. 보고 플 때마다 계속 써내려가야 할, 언제나 네가 먼저 날 생각하는구나, 고맙다 ㅎ
해방글터
^^ 나중에 페북에서 찾을라면 어렵겠드라구. 불쑥 보고 싶을게 아니겠어? 쉽게 찾아 보자구 이 사이트 만든거니, 역할을 잘 해야지.
조성웅
너의 이 배려가 내가 찾고 싶은 정치다 ㅎ 흥렬아!
해방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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