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웅 / 1969년생 / 플랜트 배관공


태풍의 중심

해방글터 0 1,097

 

3차 희망버스가 마지막 취재기사였다

울산노동뉴스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아내와 아들 문성이와 함께 추자도로 여름휴가를 떠났다  

 

1. 생계형 막기자

 

마르크스와 레닌은 확실히 혁명의 종군기자였지만 

난 생계형 막기자였다

 

난 레닌의 직업적 혁명가 조직론에 내 청춘을 다 바쳤지만 

혁명의 시간을 앞서서 실행하는 조직은 건설되지 않았고 

혁명은 직업이 되지 못했다

 

혁명이 비어 있는 중심에 세워지는 평등이라면 

나의 비합 사회주의 활동은 반혁명의 지루한 날들이었다

난 동지를 잃고 아내를 얻었지만 

더욱 뻔뻔하게도 아내의 희생에 전적으로 의지해 왔다

어떤 희생 위에 유지되는 것들은 전망이 되지 못했다

자본주의는 오늘도 안전했다  

 

운동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울산노동뉴스 기자였다

편집장은 생계가 목적이라면 함께 일 못 한다고도 했으나

내게 생계는 전망의 문제였다

 

함께 고생했던 

미디어충청 정재은 기자와 참세상 김용욱 기자에겐 더욱 미안한 이야기지만

난 애초 기자 정신이라고는 코빼기도 없었던 생계형 막기자였다

; 쌍용자동차 공장점거 파업과 현대자동차비정규직 공장점거 파업을 잠입 취재 한 정재은 기자와 김용욱 기자는 내가 아는 한 기자 정신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이 생계형 막기자 생활이 

해고 7년 ……, 

그늘진 아내의 눈가에 웃음을 안겨줬고

아들 문성이 선물도 사주게 했다

 

이걸로 족하다 

 

세상은 상징이 아니라 땀으로 살아내는 거다 

 

2. 희망버스 

 

3차 희망버스는 어떤 경계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부산역에서도, 청학동에서도, 한진 R&D 센터 앞에서도 

희망버스 참가자들 자신의 이야기는 가려졌고

국회의원들과 제도정당의 발언만이 도드라졌다 

정리해고 없는 세상,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믿는 건

분명 시대착오적이었다

 

85크레인 아래에서 태어났던 

배제된 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합운동을 

난 알고 있다

위계도, 성별도, 연령도, 인종도, 국적도 갖지 않았던 

무차별 집단율동인 그 모습을 보고 

김진숙 동지는 한 번은 가보고 싶었던 세상이라고 말했다

저 소박한 밥상 같은 인간에 대한 단심이 빚어 낸    

한 번도 밟아본 적 없는 바람의 내륙이었다

단절과 벅차오르는 예감 사이로  

대의제도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3. 태풍 무이파의 능선을 타고 내 몸에 찾아든 민들레 씨앗 하나 

 

태풍 무이파 때문에 추자도에 1주일 가까이 고립됐다

고립 …….

난 내가 속하거나 혹은 삶을 지탱해왔던 어떤 경향과의 단절에 만족하고 있었다  

소리 내지는 않았지만 태풍 무이파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풍 무이파는 내 뚱뚱한 삶의 낡은 퇴적층들을 

2센티미터 들어 올리는 힘으로 다가왔다

태풍 무이파의 내부를 오래도록 걸었다

신경세포 하나까지 짜릿짜릿했다

모든 사물들은 임박한 사건 쪽으로 바싹 당겨져 있었고 

더더구나 혼란스러웠다

난 이 혼란스럽고 임박한 사건의 시간이 결코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곳에서 사랑하는 것들의 이름을 온몸으로 불렀다 

내가 보고 싶은 건 비어 있으므로 더욱 무성한 사랑이었다 

비어 있으므로 더욱 무성한 사랑, 

난 태풍의 중심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태풍 무이파가 지나간 자리

민들레 씨앗 하나 내 몸에 찾아들었다

 

저 민들레 씨앗은 태풍의 중심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지난밤, 태풍 무이파의 능선을 타고 

이 세계의 낡은 퇴적층들을 갈아엎으며 이곳에 도착했을 것이다

 

내 뚱뚱한 몸도 씨 뿌릴 자리라고 찾아온 

민들레 씨앗에게 고맙다

민들레 씨앗을 품은 내 몸은 

전 생을 다해 무성한 태풍의 중심을 잉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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