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웅 / 1969년생 / 플랜트 배관공


혁명이 상실된 시대의 시인詩人의 초상

해방글터 0 835

 

 

해 떨어진 곳에서는 '대 화재'가 일지 않았다

공장 굴뚝은 자석처럼

마지막 날 빛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손에 닿아

따뜻하게 빚어질 것 같은 풍경은

내 의지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난 속도 속에 정체돼 있다

 

지난 1년

책꽂이에 빽빽한 시집을 

한 권도 펼쳐 보지 못했다

아니 한 여름 시집 두어 권쯤 

모기 잡으러 빼내어 집어 들은 적 있다

피로 얼룩진 시집을 책꽂이에 다시 꽂았다

 

- 돈가방과 섹스에 친숙해지기 위해서라도 부르주아의 사타구니를 빨아야 산다는 생각은 어찌 보면 순진하다. 몸 파는 것이 훌륭한 예술적 자질이기에, 문단 변두리에 어설프게 이름 석자 끼어 넣지 않겠다는 생각은 순진하다 못해 낡은 삼류이다. 저요! 저요! 한 십 년 배 곯은 자들. 이 시대 모든 예술적 전위는 임금노동자다. 비로소 임금노동자가 됨으로써 명망성을 얻는다. 

- 이제 시詩의 가락을 잊은 지도 오래, 산문에 익숙해진 나는 지하철 노동자의 파업 속에서 선전선동문을 작성한다. 한 때 김남주와 박노해와 백무산을 뛰어넘겠다고, '시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고성방가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말장난하지 말고 "네 시詩에 운명을 표현해라!"고 말씀하셨다. 본명을 버리는 것은 새로운 삶의 기준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 김남주와 박노해와 백무산, 스스로 계급의 이름을 획득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투쟁의 깊숙한 곳에서 뻗어 나오는 노래였다. 노동자계급의 손으로 빚어낸, 육체를 가진 당대의 투쟁혼이었다. 419에는 김수영과 신동엽이, 남민전에는 김남주가, 사노맹에는 박노해와 백무산이 있었듯, "시詩에 노동자계급의 미래를 표현하라!" 투쟁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뻗어 나오는 노래, 가능한 모든 패배를 경험한 손에서 빚어지는 연대의 희망, 그 속에서 불려지는 새로운 이름(결코 포기할 수 없는 신뢰), 동지! 내 삶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것만으로도 족하다

 

혁명이 어설프게 개량으로 옷 벗는 시대

혁명의 모든 조건이 구비되어 있어도

- 도망간 자들이여

그대는 일관되게 혁명을 살았겠는가?

 

공장지대의 깊숙한 내부,

모두들 고해성사의 반성문을 쓰고 개과천선하던 시기

반성문도 못쓰고 한 여자를 만나 한 살림 차린 사내가 있다

사내는 시인이자 가수였고

이론가이자 조직가였다

모두들 고해성사의 반성문을 쓰고 개과천선하던 시기

사내는 아이의 이름을 호적에 올리지 못했다

아니 사소한 불편함을 견디기로 했다

사내의 노래는 허공에 빠지지 않았고

정치는 허명虛名으로 전락하지 않았다

시대의 꽉 찬 몸짓, 시詩로

나는 그에게 가고 있다

 

해떨어진 곳에서는 자줏빛의 저녁노을이 

내 시詩의 행간을 타고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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