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웅 / 1969년생 / 플랜트 배관공


두번째 시집 "물으면서 전진한다" - <발문>/ 정남영

해방글터 0 1,116

 

<발문>

노동의 분할을 넘어서 우리 모두의 하나됨으로

 

정남영

 

 

 

 

 

현재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남한 노동운동의 적실한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본의 노동자분할전략으로 인해 해방을 위한 투쟁의 대열에서 대거 이탈한 상황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계승자로서의 적실성을 더욱더 높여준다. 조성웅의 새 시집 ꡔ물으면서 전진한다ꡕ는 그 주된 성격이 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의 기록이요 표현이다.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조건에 상응하게 이 시집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처절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대부분 동지의 떠남(「내 친구 우석이」), 지도부에 대한 불신(「절망은 없다」, 「용감한 관료들과 어설픈 투사들」, 「투쟁이 있는 곳에서 투쟁을 확대하라」 등), 동지의 분신과 죽음(「우리는 죽어도 동지를 그냥 보낼 수 없다」, 「한진중공업 가는 길」, 「죽어도 열사를 꿈꾸지 말라」, 「죽음의 공장」, 「투쟁이 있는 곳에서 투쟁을 확대하라」 등」)으로 이루어지며, 승리의 에피소드도 없지는 않으나(「삶은 변한다」) 전체적으로 소수이다. 따라서 “투쟁이 소진 되가는 자리, 침묵하는 조합원들 / 이제 분노조차 사라진 현장”(「우리는 죽어도 동지를 그냥 보낼 수 없다」)과 같은 구절들이 전달하는 가라앉은 분위기가 이 시집의 주요한 한 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현실의 열악함에 좌절하지 않고 투쟁의 의지를 표현한 부분들도 많이 보이는데, 이 부분은 이 시집이 상황의 단순한 재현에 그치지 않게 하는 것으로서 박노해, 백무산으로 대표되는 노동시의 대표적 표현방식을 이어받은 것이기도 하다. 다만 이제는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박노해와 백무산의 노동시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노동자 형상이 발하는 투쟁의 의지이다. 이런 의미에서 조성웅은 80년대의 투쟁적인 노동시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성웅이 그 시적 성취에 있어서 박노해나 백무산을 넘어섰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렇게 시적 성취를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보다는 과연 조성웅이 새로워진 상황에 적합하게 박노해나 백무산의 노동시들에서와는 다른 고민을, 다른 시적 탐구를 하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나는 조성웅의 첫 시집에 담긴 시적 사유가 전위주의 혹은 중앙집중주의와는 다른 방식의 투쟁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음에 주목한 바 있었다. 이제 이번 시집에서 조성웅은 이 측면에서 한편으로는 정체를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정한 진전을 보여준다. 그의 시들에는 지도부의 문제점에 대한 보고들이 수두룩한데, 이것이 지도부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 즉 대의(代議)체계 자체의 근본적 비민주성에 대한 비판―당이 대중을, 지도부가 대중을 대신하는 체제 자체의 비판―으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시인은 끊임없이 올바른 지도부를 아쉬워한다. “투쟁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투쟁지도부가 부재한 것!”이라고 말이다(「용감한 관료들과 어설픈 투사들」).

 

시인은 또한 권력의 문제에 있어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새로운 사람은 중앙으로 집중된 권력을 현장으로 끌어내리는 사람이다”(「물으면서 전진한다」)와 같은 구절, 혹은 “조직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권력의 위험을 체득하고 있는 나이”(「슬픔이 깊을수록 투쟁의 강도는 강하다」)와 같은 구절에서 시인은 권력의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보인다. 그러나 아직은 권력에 대하여 ‘비판적 지지’의 입장에 있는 것이지 그것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시집에는 조성웅의 앞으로의 시적 사유의 발전을 기대해 볼 수 있게 하는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다. 권력이나 지도부로 대표되는 것과는 다른 식의 결합방식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조성웅은 이 결합방식을 몸과 몸의 연결에서 본다. “죽음에 직면한 육체에서 피어나는 / 이 웃음, 웃음” (「함께 밥을 먹으면 정이 든다」), “동지가 동지의 투쟁 무기가 됩니다” (「함께 한 만큼 내일입니다」, “우리는 함께 일하고 함께 밥 먹고 함께 성장 한다”(「삶은 변한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투쟁 속에서 서로 눈빛이 닮고 표정이 닮고 웃음의 속살까지 닮아버린 동지들 / 우리 모두가 서로의 희망이다”(「절망은 없다」), “조합원들의 마음과 마음이 이어져 가는 방법처럼”(「용수아이가」) 등등. 

 

몸과 몸의 만남은 실로 조성웅의 밑바닥 힘의 근원으로서 앞으로 그가 지도-피지도의 문제, 권력의 문제 등을 훌쩍 넘어설 수 있는 잠재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몸과 몸의 만남은 만나서 서로 교류하고 교감하여 공통적인 것을 형성하는 수평적 관계로서 지도-피지도 관계 혹은 권력관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성웅이 정규직/비정규직의 분할을 거부하고 ‘노동자의 하나됨’을 주장하는 것도 이렇게 몸과 몸의 만남에 근거를 둘 때 비로소 가장 철저하고 수미일관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몸과 몸의 만남에 대한 그의 탐구는 아직 미완성이다. 따라서 그의 시가 새로운 전망을 열어준다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전망이란 펼쳐진 것, 미래로 투사된 것, 미지로 날려진 시간의 화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몸과 몸의 연결은 분명 화살을 날리는 동력이긴 하지만 아직 화살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비정규직 운동이 일정한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는 현재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유와 실천은 병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정규직 투쟁이 이미 완성(?)되어있기를 바랄 수가 없는 것처럼 이제 투쟁의 와중에서 힘들게 두 번째 시집을 내는 조성웅의 시적 사유가 이미 완성되어있기를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ꡔ물으면서 전진한다ꡕ에는 그의 시적 사유의 발전을 도울 또 다른 요소들이 존재한다. 그 하나는 이미 존재하는 정치이론적, 정치사상적 판단에 의존하지 않는 감성적 판단이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이는 주로 ‘환하다’라는 형용어, 연두색의 이미지, ‘새싹’의 이미지, 봄의 이미지들로 표현된다. “아내의 환한 웃음이, 그 첫걸음이 내 투쟁 전술이었다”(「입덧은 투쟁신호처럼 왔다」), “봄빛처럼, 봄빛을 품은 새싹처럼 나도 강해지고 싶다”(「새싹에게 고맙다」), “머리띠를 받아 든 나이 60의 늙은 노동자가 / 환하게 / 환하게 / 생애 처음 같은 웃음을 짓는다”(「환하게」) 등등의 많은 구절들이 이에 해당한다. 

 

사용되는 이미지들은 몇 개 되지도 않고, 또 그다지 크게 변주되지도 않지만, 이러한 감성적 형태의 판단이 현실에 대한 시인의 어떤 스피노자적 의미에서의 윤리적 판단(그리고 그렇기에 삶의 입장에서의 정치적인 판단)을 동반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판단에는 맨몸뚱이 그대로의 인간의 잠재력에 대한 강한 긍정이 들어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과거로부터 이미 형성된 형태로 물려받지만 다른 한편 해방의 기획은 언제나 맨몸뚱이 인간이 가진 잠재력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출발점일 뿐 아직 ‘집단적 지성과 공동체에 대한 사랑으로 풍부하게 된 인간’은 아니다. 시인의 언어를 사용하자면, ‘단결된 계급’은 아직 아니다.  

 

이러한 판단들,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굳어진다면 하나의 개인적인 상투형들이 될 수도 있지만, 계속 살아있다면 그가 이어받고 있는 많은 굳어진 정치사상 요소들―권력, 전위, 당, 노조, 지도부, 총파업, 현장, 정치세력화―에 대한 해독제로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맨몸뚱이 인간이 가진 잠재력(‘연두색 새순’)이 ‘집단적 지성과 공동체에 대한 사랑으로 풍부하게 된 인간집단’의 형성으로 발전하는 궤적을 시적으로 탐구하는 데서 주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시적 사유의 발전을 도울 또 하나의 요소는 시인이 몇 군데에서 표현하는, 미리 정해진 이론적 판단들에 따르지 않고 늘 묻는 자세를 취하겠다는 다짐이다. 예컨대 「봄의 내부」에서는 “답 없는 계절”이 답답한 세월로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사방이 온통 꽃 소식”인 계절로 이어지는 것으로 제시되며, 「2002년 12월 겨울나무」에서는 시인이 “이제 뿌리는 물음이고 율동이고 싸움이지”라고 노래한다. 무엇보다도 「물으면서 전진한다」라는 시 전체가 이런 다짐을 본격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감성적ㆍ윤리적 판단은 이러한 다짐의 큰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미리 어떤 이론적 판단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이며, 따라서 상황마다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종합하는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그대에게 가는 일의 순서―조선남 동지에게」에서 보이는 시적 성취를 간략하게 음미해보기로 하자. 

 

그대에게 가는 길은 

벌써 몇 시간 째 정체되고 있다

이 지루하고 무미건조한 시간을 견뎌야하는 정체가

그대에게 가는 일의 순서일까

느릿한 풍경들이 정지되고

나는 차분하게 봄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자줏빛의 복숭아 꽃, 노란 개나리, 초록의 새싹들 연둣빛의 봄 하늘, 흰 구름

내가 미처 마음 주지 않은 곳에서 무엇인가 자꾸 자꾸 일어서려는 것들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내부를 환하게 채우는 일,

그대에게 가는 일의 순서

이 정체 속에서도 

표 나지 않게 숨통을 탁, 트이게 하는  

자기 빛깔로 한 계절을 나는 것들

자기 빛깔로 최선인 삶이

어우러져 내 안으로 들어온다

이 정체 속에서도 

나를 환하게 환하게 다 채우고서야 그대에게 가는 길

길 밖의 풍경, 풍경 속의 길

이 색감과 향기와 일어서려는 기운들을

다 안아 가고 싶다

그대 삶에 심어주고 싶다

 

이 시에는 구호성의 어구가 전혀 없다. 그러면서도 화자의 생각과 정서가 파스텔처럼 번져 시를 가득 채운다. 시인이 좋아하는 이미지들도 여기서는 마치 일종의 구호처럼 던져지기보다 서로 상호관계를 맺어 풍성한 장(場)을 이룬다. 그리하여 시 전체는 동지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이 단순한 조급함과는 다른 차원의 충만한 간절함으로 다가오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방식의 ‘다가감’이 확대되고 또 확대되는 과정에서 모든 노동자의 하나됨, 더 나아가 자본의 지배 아래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하나됨이 이루어지고 종국에는 자본의 지배로부터의 해방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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