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웅 / 1969년생 / 플랜트 배관공
울산노동법률원에는 변호사, 노무사 그리고 나의 아내인 위 여사가 있다
위 여사는 현대자동차비정규직노동조합 초대 법규부장이었다
현대자동차비정규직노조가 만들어지기 전
입덧처럼 하청노동자 최초의 해고자 복직 투쟁을 조직했던 위 여사는
활동가들이 힘들다고 펑펑 울고 싶을 때 찾는 조직가였다
문성이 낳고 몸도 제대로 못 풀고 정신없이 투쟁 속으로 달려갔던
나보다 몇 배는 뛰어난 활동가였다
(왜 그토록 뛰어났던 수많은 여성활동가들은 운동으로부터 추방되었는가?
꽃잎 옆은 항상 위험하고 꽃향기는 평등을 향해 자라지 않았다
위 여사의 가사노동과 육아노동, 생계노동 위에 세워진 나의 운동은 본질적으로 반혁명을 닮아 있었다)
내가 집 밖에서 조직했던 비정규직 철폐투쟁은
결국 위 여사의 꿈을 금지시키고 그녀의 언어를 집안에 가뒀다
나는 금지와 배제의 언어로 너무 많은 일들을 해결해왔다
(사소한 문제로 위 여사와 크게 싸운 밤에는
“여성주의자가 모두 사회주의자는 될 수 없어도 모든 사회주의자는 여성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내게 말했던 한 동지를 생각한다
내가 오늘 당장 빼어난 여성주의자는 못 되더라도 뼈아픈 반성으로 이 시간을 나겠다는 다짐을 한다)
내가 노동조합 관료제에 맞서 싸울 때
위 여사의 고단한 퇴근길은 더더욱 쓸쓸했을 것이다
집안에 내가 지은 권력,
난 그 외로움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의 퇴근길을 따라 걷다 보면 사무치지 않은 것이 없고
난 눈물 나도록 고마운 그녀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본다
내가 모든 것을 다해 되찾고 싶은 이름
위경희 동지!
내가 모든 것을 다해 존경을 표하고 싶은 사람
위경희 동지!
해고 6년, 돈 한 푼 벌어다 주지 못했다
내가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위경희 동지는 오늘도 바르르 떠는데
사랑도 깊으면 한이 된다
서로 스며들어 서로를 완성할지니
한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비로소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