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남 / 1966년생 / 목수

들꽃처럼 풀꽃처럼

선남 2 1,192


들꽃처럼 풀꽃처럼

딸에게

 

 

 

키가 멀대같이 커지고,

아비가 보기에는 아직 여리기만 한데

저 혼자만 쑥쑥 자라, 뒤에서 보면

영락없이 아가씨티가 나지만

어미가 보기에는 아직도 품속에 젖먹이만 같은데,

 

딸아,

이른 봄에 피는 들꽃일수록 더욱 그렇겠지만

멀대같이 키만 쑥쑥 커져서야

꽃 한 송이 피우지 못한다.

 

매섭게 몰아치는 겨울바람에 몸서리를 치며,

생명의 끈을 놓지 않은 들꽃들은

추위를 견뎌내기 위해, 겨울밤을 이겨내기 위해

마른 잎들을 스스로 떨구어 내면서도

푸른 들판을 잊지 않기 위해, 새봄의 꿈을 잊지 않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들을 외롭고 쓸쓸하게 보냈겠느냐

그렇게 겨울을 나야

그렇게 겨울을 스스로 이겨내야 꽃을 피우는구나.

 

풀 한 포기, 들꽃 하나에도 생명이 깃드는데

지난겨울, 저희들도 견디기 힘들었겠지만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도 견디기 힘들었다.

스스로 살아남기를 스스로 이겨내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사람의 마음도, 겨울밤 그 목마름을 함께 겪어냈구나,

 

아직 먼 산에는 쌓인 눈도 녹지 않았는데

아직 두터운 외투를 갈아입지 못하는데

연분홍 꽃대를 물고 배시시 웃는

봄꽃에 그만 눈물이 난다.

 

이 밤이 지나고,

너를 품에서 떼어 내어 멀리 보내야 하는구나,

네가 보고 싶고 그리워질수록

아비의 마음으로부터 너를 떼어 내는 일이

더욱 힘들겠구나,

겨울을 이겨내고 봄꽃으로 피어나려무나.

배시시 연분홍 꽃대를 물고 피어나려무나.

들꽃같이, 풀꽃같이 환히 피어나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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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선남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안학교로 가기로 결정하고 딸에게 쓴 편지......... 그러나, 그 딸은
해방글터
그러나, 그 딸은... 들꽃같이, 풀꽃같이 환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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