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남 / 1966년생 / 목수

소낙비 내리던 여름날 밤

선남 0 1,200

 

소낙비 내리던 여름날 밤

(채 영희 선생님의 이야기를 받아쓰다. )

 

 

 

 

밤새 소낙비가 퍼붓습니다.

빗소리,

나무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

울부짖는 소리,

처절한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수많은 날들 중, 그 어느 여름날

임종을 앞둔 사람

그의 마지막 숨결을 듣고

한 시대를 같이 아파했던 사람,

그의 아내는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않고

두 손을 꼭 잡아끕니다.

 

 

평생을 가슴 속에 묻어 두고 싶었던 이야기,

끝내 저렇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초점 잃은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누구에게도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았던

슬픔들,

 

 

그 슬픔 위로 장대 같은 소낙비는

밤새 쏟아지고,

창문을 흔드는 바람,

바람이 부딪치고 사라지는

,

 

 

그 고통스러웠던 기억들

안으로만 삭여내고,

매질과 학대와 손가락질을

몸으로 받아 낼 수밖에 없었던

배고픔들, 서러움들.

 

 

어미 없이 자란 근본 없는 놈으로

아비 없이 자란 막돼먹은 놈으로

빨갱이 자식으로,

빨갱이 자식이 어디 가겠나.”

전과자의 붉은 낙인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날들,

살을 찢고, 뼈를 녹이는 아픔으로

살아온 날들

증오의 날들,

저주스러웠던 세월

깡그리 잊고 싶었던 나날들.

 

 

그 고통스러웠던 여정을 끝내고

이제 눈빛으로만 말하는

그 슬픈 눈을 바라보고

나는,

바보같이 왜 한마디도 못했을까?”

묻고 또 묻습니다.

그는 나에게

이제 가슴 깊이 질러 놓은

무거운 빗장을 풀라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소낙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부딪치고

거센 물줄기가 바위에 부딪혀

깜깜한 밤하늘에 울부짖음으로 들리고

살아온 세월,

가슴 깊이 질러 놓았던

쇠 빗장이 풀리고

 

 

, 꼭 숨겨 두고 싶었던

누구에게도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았던

아픔들,

고통스럽다고 말 한마디 못했던

그 기억들이 이제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동지의 숨결 앞에

가슴 닫아 두었던 빗장이 열리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어머니에 대한 애잔한 슬픔도

천형보다 무거웠던

빨갱이 자식이라는 낙인도

세찬 빗줄기는

눈물이 되어 가슴으로 넘쳐흘러

계곡을 타고 거센 물줄기가 되어

흘러넘치고

 

 

새벽이 밝아 옵니다.

어느덧 비는 그치고,

태풍이 몰고 간

지난밤의 아픔을 잊은 듯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장닭이 긴 울음을 토해냅니다.

 

 

열려진 창으로 바람이 불고,

난초 묵화가 그려진 삼베 커튼은

그네를 타듯 바람에 흔들립니다.

꺾여진 난초 묵화 옆 작은 글씨

상처투성이의 영혼을 헹구고 싶다

상처받은 내 마음을 표현하듯,

바람에 흔들리는 삼베 커튼에

눈길이 갑니다.

 

 

소낙비 내리던 한여름 밤의 어둠을 뒤로하고

새벽이 밝아 옵니다.

지난밤,

울음을 토해내던 바람 소리, 빗소리,

그리워, 그리움으로 누군가를 부르던 소리

새벽이 밝아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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