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순덕1963년생 / 자동차 부품 하청노동자

 

늙은 노동자의 독백

해방글터 0 748

 

 

불어오는 바람만큼만 펄럭이는 저 깃발

세상 이치 깨우쳐 주듯

답답한 내 숨통 틔워주는 것 같아

휴식시간마다 담배 꼬나 물고

공장 담 밑에 앉아 쳐다본다

 

내가 저 깃발 알기 전에는

소처럼 열심히 일만 했지

이 도시 저 도시 떠돌며

안 해 본 일 없지만

어찌 된 일인지 입에 풀칠하기 빠듯하다

 

막내딸, 남들처럼

공부시키지 못한 게 가슴에 맺혀

시집갈 때 장롱하나라도 

애비 손으로 장만해주고 싶은 욕심에

 

철야, 시켜만 준다면

시멘트 바닥에 한뎃잠이면 어떻고,

쓰린 속 시원할 해장국 대신

목구멍에 걸리는 컵 라면이 대수겠니               

아예 이불보따리 싸들고 출근하던 날

 

노동조합 젊은것들이 싫은 소리를 했지만

제 놈들이 세상물정 뭘 알겠나 싶어 

들은 척도 안 했지

 

납품물량 바쁘고 일손 딸린다고

쉬는 날 없이 뺑뺑이 돌리더니

어디 가서 젊은것들 몇 데리고 와서

늙은 것들은 나가라 하네,

대통령만 개혁하는 줄 알았더니

쬐그만 우리 공장도 개혁한다고

 

하지만 이젠 호락호락 물러설 수 없지

올 여름 세상 휩쓸고 간 비바람에도 

굳건하게 펄럭이던 

내 삶에 희망 같은 저 깃발

뺏길 수야 없지 암 없고말고...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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