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순덕1963년생 / 자동차 부품 하청노동자

 

내 삶에 이야기

해방글터 0 882

 

 

책은 교과서만 있는 줄 알았던 어린 시절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 도서관에서 

빨간 머리 앤 을 읽고 동화책을 알았고

중학교 일 학년 때 선생님께서 건네주신

토스톨이 부활을 읽고 

소설은 이렇게 쓰는구나 느꼈지.

 

끼니 때우는 날 보다 거르는 배고픈 날이 더 많던 

중학교 2학년 쬐금한 꼬맹이가

키워보지도 못한 꿈을 멍든 가슴으로

땅속 깊이 묻고 신발 공장 시다공이 되었지

손가락 부릅트고 두 다리 퉁퉁 붓고

미싱공 언니들한테 욕 얻어먹으면서 

오로지 배우고 싶다는 열정하나로

어렵게 다시 시작한 야간학교 

 

친구들 글짓기 숙제 해주고

기숙사 언니들 연애편지 대신 써주면서

어줍게 배운 서툰 글 솜씨에

감히 시인이 되고 싶다고 꿈꾸었지

 

내 꿈 멀어지는 만큼 희미해지는 눈빛 

힘겨운 삶들이 내 영혼마저 갈아먹을 무렵

문학강좌 있다기에 찾아간 곳이 노동야학 이였네

처음으로 박노해 시를 읽고 

이게 시냐고 삶에 넋두리고 하소연이라고 반박했지.

 

세상을 알게 되면서 깨달았네

내가 알고 있던 글들은

힘없이 뚝뚝 부서지는 마른 나뭇가지 였다는걸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역사의 주체인 노동자라는 것을 

 

노동자 내 이름 찾겠다고 노동조합 만들다

구속되어 감방 갈 때 속옷 속에 감춰둔

볼펜 마저 빼앗길 때 난 비로소 자유를 빼앗겼다.

 

해고당하고 블랙 리스트 때문에

이 공장 저 공장으로 쫓겨다니던 신세에 지쳐 갈 때 

내 좋다는 사람이랑 결혼해

글하곤 담쌓고 살아가는 남편과 개구쟁이 두 놈에 치여

10년 넘도록 책 한권 글 한줄 읽고 쓸 

여유 잃어버린 채 살다가

 

나이 마흔에 고마운 이들 만나 

땅속 깊이 감춰둔 어릴 적 꿈 되찾아 보네

오랜 세월에 빛 바래 퇴색되었다 하여도

아니 퇴색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여도

굳은 손으로 파내는 내내 콩콩 뛰는 

설레이는 이 마음만으로도 행복하다 

 

 

2001년 6월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밴드로 보내기

Comments

카테고리
반응형 구글광고 등
최근통계
  • 현재 접속자 9 명
  • 오늘 방문자 451 명
  • 어제 방문자 521 명
  • 최대 방문자 2,936 명
  • 전체 방문자 465,217 명
  • 전체 회원수 15 명
  • 전체 게시물 15,811 개
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네이버밴드에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