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오는 바람만큼만 펄럭이는 저 깃발
세상 이치 깨우쳐 주듯
답답한 내 숨통 틔워주는 것 같아
휴식시간마다 담배 꼬나 물고
공장 담 밑에 앉아 쳐다본다
내가 저 깃발 알기 전에는
소처럼 열심히 일만 했지
이 도시 저 도시 떠돌며
안 해 본 일 없지만
어찌 된 일인지 입에 풀칠하기 빠듯하다
막내딸, 남들처럼
공부시키지 못한 게 가슴에 맺혀
시집갈 때 장롱하나라도
애비 손으로 장만해주고 싶은 욕심에
철야, 시켜만 준다면
시멘트 바닥에 한뎃잠이면 어떻고,
쓰린 속 시원할 해장국 대신
목구멍에 걸리는 컵 라면이 대수겠니
아예 이불보따리 싸들고 출근하던 날
노동조합 젊은것들이 싫은 소리를 했지만
제 놈들이 세상물정 뭘 알겠나 싶어
들은 척도 안 했지
납품물량 바쁘고 일손 딸린다고
쉬는 날 없이 뺑뺑이 돌리더니
어디 가서 젊은것들 몇 데리고 와서
늙은 것들은 나가라 하네,
대통령만 개혁하는 줄 알았더니
쬐그만 우리 공장도 개혁한다고
하지만 이젠 호락호락 물러설 수 없지
올 여름 세상 휩쓸고 간 비바람에도
굳건하게 펄럭이던
내 삶에 희망 같은 저 깃발
뺏길 수야 없지 암 없고말고...
2001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