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밀양 송전탑투쟁10주년 시화전

이 슬프고, 슬픈 평화의 땅에

선남 0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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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슬프고슬픈 평화의 땅에

 

 

- 1 -

 

 

꽃이 피고낙엽이지고,

움막에 모락 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고,

마실 나온 할매들은 전을 붙이고,

눈 내리는 움막 앞을 지나는 낮선 차들도

좁은 산길 가로 질러 묶어 놓은 저지선 앞에서

평밭마을 누구네 집에 다니려 왔다고 말하며

통과 시키는 풍경이

오래되고 익숙한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벌써 몇 해째 움막을 지어놓고

할매들이 길목을 지키는 모습은

마을의 평화로운 풍경이 되었다.

 

 

눈이 내리고먼 산에 흰 눈이 쌓여 있어도

움막 밖에는 파릇 파릇 새 순이 돋는다.

또 한 해가 바뀌고,

봄바람에 풍경이 흔들리듯

소나무에 매달린 낡은 오랏줄이 소리 없이

흔들리지만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마을을 지키는 장승처럼,

마을 입구 움막에는 할매들의 택호로

당번을 정해이름을 붙여 놓고

당번이 아니라 해도 눈을 뜨면 동네 마실 가듯이

모여들었고흐린 날은 전을 붙이고,

궂은 날은 국수를 밀면서

옛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움막의 낡은 달력은 해를 넘기고

마을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 2 -

 

 

쇠사슬에 목을 매고가스통을 껴안고

죽는 한이 있어도 송전탑은 안 된다는

할매들의 눈빛에는 두려움 보다

평화가 깃들이 있었다.

6월 11일 전까지는 그랬다.

 

 

행정대집행을 한다는 최고장이 우스웠고

경찰서 조사를 받으면서

검사실에서 조사를 받는 것도

재미있는 일화처럼 평화로웠다.

6월 11일 전까지는 그랬다.

 

 

화악산 깊은 골에서 뻑꾸기가 울고,

아랫마을 모심기를 끝낸 논에서 제법 푸른빛이 돌고

들도 산도 초록으로 물들어 가는 초여름이었다.

조용한 시골마을에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진도 앞바다에서 자식 잃은 어미의 통곡이 잦아들고

헬기의 소음에 유산한 짐승은 밤새 울부짖었다.

하늘을 나는 새떼들도 자취를 감췄다.

 

 

수천의 경찰들이 마을 에워싸고

수천의 경찰들이 산을 에워싸고

수백의 공무원들과한전 용역들이

마을을 지키는 장승을 뽑아내듯

움막을 철거했다.

 

 

목을 매달겠다는 쇠사슬을

절단기로 잘라내고수녀님들의 기도소리는

경찰들의 작전명령 소리와헬기 소리에

진압되었다.

알몸으로 저항하는 할매를 겁탈하듯이

그렇게 평화로운 마을은 짓밟혔다.

날이 흐리고 비가 내리면 파전을 붙여 내 놓고,

길 가는 사람도 불러 앉혀 막걸리를 권하던

평화로운 마을은 순식간에 짓밟혔다점령군에 의해

 

 

그 순간 고요하고 평화롭게 눈 내리던 마을도

꽃이 피고바람 따라 낙엽이 흩날리던 산길도

점령군에 의해 짓밟혔다.

눈물을 흘리며 간절하게 기도하는 수녀님의

묵주가 저들의 군화발에 짓밟혔다.

 

 

작전을 완수한 점령군은

손가락 두 개를 펼쳐 기념사진을 찍었다.

밀양 할매들의 눈물 위에서

철거된 움막의 잔재들 위해서 영정사진을 찍었다.

평화와 생명의 땅을 짓밟고,

평화의 땅에 'NO 129' 붉은 말뚝을 박았다.

평화로운 할매들의 눈물위에

눈 내리고 꽃피는 생명의 땅에

송전탑 쇠말뚝을 박았다.

 

 

누가 와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랴

흔들리는 눈빛허망한 가슴에 노래 한 자락 불러주랴

평화의 노래를 불러주랴.

이 슬프고 슬픈 평화의 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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