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현 / 1973년생 / 공공운수노조 대경지부 조직부장
단식
-경대병원 주차관리 해고노동자들의 단식에 부쳐
밥을 굶는다
먹이고 거두어야 할
누군가의 밥을 지키기 위해
밥을 굶는다
시키면 시키는데로
먹어왔던 비루한 밥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존엄의 밥을 위해
밥을 굶는다
해고통보를 받은 날
막막함과 함께 먹었던 밥을
생각하며
밥을 굶는다
퇴직금을 들고 야반도주한
사장집을 찾아가던 날
오히려 경찰에게 잡혀
울분에 차서 먹던
밥을 생각하며
밥을 굶는다
보잘것 없는 비정규직
2년 쓰고 버려지는 비정규직
재계약 할 때 마다
조마조마하며 먹던
체할까 두렵던 밥을 생각하며
밥을 굶는다
굶으면 굶을 수록 선명하게
떠오르는 삶의 희망
죽을 각오로 굶어야
겨우 눈길 한번 내비치는
세상을 이겨내기 위해
오늘,
경북대비정규직주차관리해고노동자들이
밥을 굶는다
"밥을 굶는다"는 표현이 7번 반복되며, 어째서 밥을 굶는지를 설명한다.
김철수도 이순이도 아니고, <경북대 병원 비정규직 주차관리 해고 노동자>라는 긴 이름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이들은, 밥을 찾는 방법이 밥을 굶는 것 밖에 없다. 목숨을 살리는 방법이 목숨을 매다는 것 밖에 없다.
단식투쟁은 자연의 법칙도 우주의 질서도 아니고, 오로지 인간이기 때문에 생기는 생존의 방법이다. 상식도 도덕도 법도 아니고, 오로지 목숨을 걸어야만 아주 잠깐, 설핏, 찰나의 존재를 획득하는 극한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단식투쟁은 자연계에 속하는 어떤 짐승의 슬픔보다 더 슬픈 긴 울음이며, 장이 아홉토막 났다는 어미원숭이의 슬픔에 비견되는, 끊을 수 없는 존재와 생명에 대한 마지막 한가닥의 본능이자 끈이다.
인간을 퍼내고 퍼내서 그 가장 밑바닥에 남은 것이 무엇일지를 생각한다면, 모든 것을 떠나보내고 끊어도 기어이 남는 마지막 한가지가 무엇일지를 생각한다면, 슬픔, 설움, 사랑, 믿음, 소망, 고독, 외로움, 분노, .. 그 많은 것들 중에서 결국은 밥일 것이다. 밥은 생명이기 때문이고, 밥을 얻기위해 그 모든 감정과 외투들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비워낸 맨바닥에서도 생명은 존재하고, 존재하려면 밥이 필요하다.
사람은 밥그릇이다. 담았다 비우고 담았다 비워야 산다. 일정 시간동안 밥의 온기가 담기지 못하면 사람이라는 밥그릇은 죽는다. 더 이상 밥을 담지 못하게 된다. 밥을 담고 비우는게 삶이고, 밥을 담지 못하는 게 죽음이다.
어떻게 단식을 하는가 하면,
해고의 밥을 생각하며,
울분의 밥을 생각하며,
조마조마하던 밥을 생각하며,
단식을 한다. 막막하고, 분하고, 조마조마하던 밥이다. 정당한 노동을 제공하고 먹는 밥이 왜 그렇게 체할까 두려운 밥이 되어야 하는가, 세상인심이 왜 그런가를 고민하는 단식이다.
왜 하는가 하면,
누군가의 밥을 위해, 존엄의 밥을 위해,
죽어라고 굶어야 겨우 한번 봐주는 세상을 이기기 위해,
단식을 한다. 함께 살기 위해, 겨우 한번 봐주는 무한경쟁의 세상을 극복하고, 언제라도 약자를 돌아봐주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인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더냐고 하면,
굶으면 굶을수록 선명하게
떠오르는 삶의 희망
이라는 것이다. 죽음에 가까울 수록 삶이 강력해지더라는 것이다.
단식투쟁은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배웠던 살신성인의 일화를 닮았다. 존경하고 숭고하게 생각하라던 말씀의 대상이었던 성인의 행적을 닮았다. 그런데, 현실에서 만나는 살신성인의 성인들은, 경북대 병원에 있고, 비정규직이고, 주차관리직이고, 해고자이다.
공부를 잘해 높은데 올라간 분들이 존경해 마지 않는 성인의 삶이 그 발밑에 깔렸고, 그 발에 의해 만들어 진다.
이것은 어쩌면 밥이 주는 모순이며, 밥이 주는 설움이지만, 밥이 지탱하고 있는 도덕율의 강고함이기도 하다. 밥 때문에 분하고 밥때문에 서럽지만, 밥이 있기 때문에 고위직의 폭력을 서릿발처럼 꾸짖을 수 있기도 하다는 것이고, 목숨이 붙은 자로서 어떤 권력자도 밥의 도덕율을 벗어날 수 없다는 원칙이, 아무 힘도 없는 어떤 비정규해고노동자들에게 단식투쟁의 힘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권력은 밥에서 나온다. 그 밥을 거부하는 목숨의 의미는 권력을 너에게 주지 않겠다는 것이고, 권력을 부인한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지나간다.
세상은 그 뜻조차 왜곡하고, 그것이 공갈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훼하더라도, 더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사람들의 절박함은 폄훼를 뛰어넘는 진정성만 남아있을 수 밖에 없다. 폄훼와 의심을 넘어 시인의 눈에 그 진정성이 보였다는 것만이 중요하다. 절박한 사람들끼리 통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
<경북대비정규직주차관리해고노동자>들을 응원하러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