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동
잠시 한눈을 판 사이
겨울은 세상을 덮치고
바람도 거칠게 치밀어
어둠 속의 길은 매섭다
두려움을 이겨내듯
드문드문 서있는 가로등은
텅 빈 길을 확인시켜줄 뿐
홀로 선다는 건
눈보라를 맞는 것이다
겨울밤
맨몸으로 선 느티나무 아래서
무엇을 잘못 했는지
누구를 아프게 했는지
세상으로 그어놓은 생채기는
또 얼마나 많은지
뒤따라온 발자국마다
또렷이 드러나는 흔적을 보며
유난히 화가 난 솔바람에게
두 볼 다 내어주고
다시
홀로 선다는 건
따뜻한 사람의 체온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원효사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 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데려가 버린다
눈보라여, 오류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 데 아주아주 추운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사람소리가 짐승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왜 광기인가
뺨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 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 황지우 시집 < 게눈 속의 연꽃 >, 문학과지성사
시적 기술만 잠깐 말하자면, 붕어님은 눈보라를 뚫고 가며 잠시 생각나진 것을 정리해서 읊는 반면, 기성 시인은 이때 저때 생각난 것을 메모했다가 시를 쓸 때 합쳐서 정리를 합니다. 한 순간의 감흥과 여러순간의 감흥의 차이입니다. 한 순간의 감흥을 한편의 시라고 하면, 기성 시인의 시 한편은 사실 여러편의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건 그냥 기술적인 문제인데, 그럼으로서 한연한연이 시적 감흥으로 가득한 효과를 볼 수 잇습니다. 떠오르는 시상을 적어 놓았다가 시를 쓸 때 합쳐보시면, 황지우 시인의 눈보라 처럼 한연한연이 살아있는 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총체적인 편집의 묘는 따로 고민을 하셔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