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동

기원

붕어 4 1,676

​냉이며 꽃다지

이른 봄볕에 해바라기하는 오후

땅만 파먹고 살아보겠다는

땅 한 평 없는 대중이형이

보드라운 상토를 채운 모종판에

밥을 심고

반찬을 심고

막걸리를 심고

아내 옷가지도 심고

두 아들의 새신발도 심는다

부디

저 희망들이

고라니에게 뜯기지 않기를

태풍에 쓰러지지 않기를

탄저병에 말라 비틀어지지 않기를

부디

흙 뭍은 땀방울로 다져 넣는

저 희망들이

갈라진 손 위로 고스란히 안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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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박상화
냉이며 꽃다지
이른 봄볕에 해바라기하는 오후

: 이 부분은 사족이다. 시의 주제와 연관도 없고, 봄을 설명하기엔 굳이 필요가 없고, 해바라기도 오후도 그렇다. 빼고 읽어도 시의 다른부분에 아무런 영향도 없고 연관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족이다. 통상 정경을 설명하기 위해 배경그림을 넣는데, 배경그림이 있어야만 하는 경우가 있고, 없어도 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는 밥과 신발을 심는 장면이 요지이므로 배경그림이 중요치 않다. 그럴 경우, 배경그림은 핵심을 이해하는 시선을 분리시키는 역할을 한다. 산만해진다는 말이지. 그걸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시와 연관하여 유기적 통일성을 가지는 지, 산만해지는지.

달리 생각해서 이 부분이 맨 뒤로 갔다면, 또 다르다. 같은 말이지만, 배치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것이다. 맨 뒤로 가면 냉이며 꽃다지는 땅한평 없는 대종이 형이 되고, 해바라기는 기원이 된다. 그래서 은유가 발생하고 배경을 그린듯하지만 넌지시 시와 합치되는 것이다. 즉, 결론-서론-본론의 형태를 띠는 지금은 결론이 결론으로 역할을 못하고 배경이 되는데(은유가 발생하기 전이므로), 서론-본론-결론으로 자리를 바꾸면 서론-본론의 영향으로 은유가 발생하여 결론이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글 쓰는 순간에는 그런 은유가 마음에 잇었을 것이다. 냉이같은 대종이형, 농사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 잇어 펜을 들엇을 것이다. 쓰는 순서때문에 이렇게 시어들이 역할을 하기도 하고 못하기도 한다.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냉이는 대종이 형임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순서가 바뀌어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독자는 그렇지 않으므로, 순서에 따라 은유가 발생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물론 찬찬한 독자가 다 읽고 다시 올라와 첫구절을 그걸로 읽어줄 수 있으나, 작가는 가급적 독자의 시선을 끌고가는게 좋다)

땅만 파먹고 살아보겠다는
땅 한 평 없는 대중이형이
보드라운 상토를 채운 모종판에
밥을 심고
반찬을 심고
막걸리를 심고
아내 옷가지도 심고
두 아들의 새신발도 심는다

: 모종=밥이고, 생활용품이다. 이 비유는 좋다. 희망을 심는것인데, 기왕이면 노고, 대종이 형의 땀도 심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부디
저 희망들이
고라니에게 뜯기지 않기를
태풍에 쓰러지지 않기를
탄저병에 말라 비틀어지지 않기를

: 희망이 뜯기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여기선 고라니, 태풍, 탄저병만을 언급하였다. 모두 자연이다. 자연이 하는 일은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기원은 약한 인간의 종교적인 기도에 그친다. 좀 더 다른걸 생각해 보자. 저 희망을 뜯는 것은 무엇이 더 있을까. 고라니, 태풍, 탄저병은 모두 동급의 자연재해다. 나열법이 된다. 자연->인간으로 시선이 발전하면 점층법이 된다. 강조가 된다. 대종이 형은 꿈을 심었는데, 자연재해를 입을 수도 잇지만, 희망이 자라 옷이 되는 도중에 인재를 입을 수도 있다. 병이 날수도 잇고,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물가가 급격히 오르거나 할 수도 있다.

보아하니, 대종이 형은 텃밭수준이 아니라 (옷과 신발까지 마련하려고 하는 걸 보면) 남의 땅에 도지를 짓는 모양인데, 그것이 밥, 찬, 옷과 신발이 되려면 꽤 넓고 종류도 많아야 할 것이다. 그런 농민에게 가장 큰 재해는 농협이다. 종자값, 비료값, 인건비, 장비비, 농약값, 그 모든 걸 다 들여서 골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농협이 수매를 짜게 하면 남는게 없다. 새신발을 커녕 헌신발도 뺏기게 되고 만다. 태풍보다 무서운 인재의 그물망인데, 실제로 대종이형에게 물어보면, 자연재해보다 인재가 더 무서울 것이다. 그런 농민들의 마음이 담겨야한다. 그래야 시에 기둥이 서는 것이다.

부디 저 희망들이 제 값을 받게 되기를. 정도만 해도 괜찮고, 더 깊이 들어가 농민들의 현실에서 시어를 퍼 올린다면 살아 숨쉬는 시가 될 것이다. 이것이 서정시와 참여시를 가르는 기점이다. 진솔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는 것도 좋지만, 기도만 하고 말 것이냐, 그 현실을 담아 달래줄 것이냐이다. 대종이 형에게 이 시를 읽히면, '기도 고마워'로 끝날 것이냐, 공감하고 무릎을 칠 것이냐가 시를 살리고 죽이는 것이다. 곁에서 농부를 볼때 그 마음을 봐야지, 그 풍경을 보면 안된다.

부디
흙 뭍은 땀방울로 다져 넣는
저 희망들이
갈라진 손 위로 고스란히 안기길​

: 뭍은 -> 묻은. 묻은은 땅속에 묻었다 할 때도 묻은이고, 기름이 바지에 묻었다 할 때도 묻은이다. 흙묻은 땀방울도 이미지연상은 되는데, 이때 묻은은 기름이 바지에 묻었다는 묻은이다. 흙에 묻은 땀방울로 쓰면 땀을 흙에 묻었다(씨악과 희망과 함께)는 것인데, 에자 하나 더 붙이고 안붙이는데서 느낌의 차이가 크고 의미도 달라진다. 흙묻은 땀방울은 농사를 지으며 흘범벅이 되어서 땀을 흘리는 노고를 나타내는 말이다. 흙에 묻은 땀방울은 그 노고에 소망이 덧대진 말이다. 흙묻은으로 하려면 지금대로, 흙에 묻은으로 하려면 "흙에 묻은 땀방울과 희망들이"정도로 고쳐야 할 것이다. 뒤에 것으로 하면 땀과 희망과 씨가 동격이기 때문이다.

제목도 막연하다. 대종이 형을 바라보는 제3자가 되지말고, 대종이형 본인이 되어 글을 쓰면 더 좋은 글이 나온다. 관조하는 글이 아니라, 삶, 살아있는 글이 되기 때문이다. 눈 앞에 펼쳐진 정경에 대해 더 깊이 들어가기를 바란다. 시를 만드는 첫발견(대종이 형은 신발을 심는구나)은 좋았다.
붕어
무섭다..형...^-----^;;
점쟁이 같다요..ㅎ
말씀하신 1연의 1행과 2행은 시를 다 써놓고 살피다 집어넣었는데
써 놓고도 말씀하신 것처럼 꼭 필요없는 것을 써넣은 것 같아 찜찜했어요.
그리고 3연에서 형이 말한 것처럼 대중이형의 희망을 갉아먹는 현실적인 문제를 집어넣으려고 했는데....
모종과 씨앗을 심는 모습을 처음 본 느낌만을 살리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3연이 너무 급하게 마무리 됐다는 느낌도 있었는데......
그걸 콕콕 다 찝어주시네요...^-----^;
제목도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시 꼼꼼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붕어
희망을 심는 날

땅만 파먹고 살아보겠다는
땅 한 평 없는 대중이형이
보드라운 상토를 채운 모종판에
밥을 심고
반찬을 심고
막걸리를 심고
아내 옷가지도 심고
두 아들의 새신발도 심는다


* 여기까지만 남기고 다 지워버렸습니다....^^;
아래 어떤 내용을 보탤까는 좀 더 천천히 생각해 보려고요...
해방글터
땀방울을 빼겠다니 아쉽구나. 그러나 위와같은 간결함은 좋다. 자꾸 간결해야 뭔가 더 붙일 것이 생기는 법이다.
참고로 아래 시 한편을 소개한다. 이분의 이 시는 무려 당나라때의 것이다. 한 1200년전 시가 이렇다. 시는 세월이 흐른다고 발전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시 밑에 주절거린건 내가 쓴 것인데, 한시를 해석하신분은 내 기억에 한국고전번역원에 계시는 박..박사님인데, 성함이 도무지 생각이 안난다. 이 시에 대한 여러 번역이 잇는데, 이 분것이 가장 아름다왓다.

憫 農          불쌍한 농부들

                                        이신 李紳
                                                780 ~ 846

  鋤禾日當午    한낮 뙤약볕 아래서 김을 매니 

  汗滴禾下土    땀방울이 벼 아래 흙에 뚝뚝 떨어지네.

  誰知盤中손    누가 알랴, 그릇에 담긴 밥이

  粒粒皆辛苦    한 알 한 알 괴로움이 영근 것인 줄을.


-----------------

하두 오래전에 베껴놓았던 글이라 누구의 사이트에서 가져왓는지 기록도 없고 기억도 없다.
저작권법이 훌쩍 커버린 지금, 이제와 이 민망함을 어찌하랴.

많은 사람들이 이신의 이 시를 블로그나 사이트에 올리고 번역해두고 있지만,
이 번역만큼 내 맘에 쏙드는 번역이 없었다.

원 작자인 '이신'이란 분은 당나라 때 중국의 시인 겸 관직에도 있었던 분이라 전한다.
농부가 아닌분이 농부의 괴로움을 어찌 저리 잘 그렸을까 싶으면서도,
역시 몸으로 겪는 사람들은 차마 표현하지 못하는 말을, 보는 사람들이 더 잘표현하는 구나 싶다.

나는 번역문학은 분명한 창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역자들의 기량이 원작을 살리고 죽인다고 생각한다.
이 번역은 정말 기가막히다고 밖에.

립립개신고는
한알한알이 다 괴로움이다로 직역된다.
그런데 이분은 한알한알에서 착상하여 괴로움의 열매로 번역을 하셨다.
그러니 땀방울이 밥알이 되어 영근것이다.
농부의 땀이 흙에 떨어져 영근 것- 그것이 밥이라는 말씀이다.

한알 한알이 다 괴로움이다라고 하면
어찌할 수 없는 노동의 괴로움만 남는데,
괴로움이 영근것이다라고 하면
어찌하자는 노동의 열매가 남는것이다.
부정과 긍정의 선을 넘나드는 것이다.

그래서 기가 막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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