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동

물들다

붕어 0 1,109

산꼭대기 키 작은

단풍나무 가지 끝

 

새벽부터 흘린 땀으로 자란

상춧잎 닮은 이파리 하나

붉게 물들고

 

낫으로 농사 짓는 아랫집 형님

굳은살을 닮은 이파리 하나

붉게 물들고

 

시장 그늘 고구마 줄기를 까던

어머니를 닮은 이파리 하나

붉게 물들어

 

그렇게 깨어난 이파리들로

온 나무가 붉어진 다음

 

아래 섰던 낙엽송 이파리 하나

봄 바다의 기억 속에 갇힌 아이들 생각에

노랗게 물들고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낀

열아홉 청춘의 따지 못한 컵라면을 닮은

이파리 하나

노랗게 물들고

 

안전장구 없는 세상으로 추락한

에어컨 수리공의 낡은 도시락가방을 닮은

이파리 하나

노랗게 물들어

 

다시 온 나무가 노랗게 물들며

그 아랫나무의 손을 잡아

 

아래로 아래로

물이 들어

 

산이 물들고

들이 물들고

산과 들을 비추던

물이 물들어

 

비우듯 떨구는 공간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닮아가는 날

 

초록에 갇혔던 계절을 가르며

다르지만 다르지 않게

세상을 바꿔가는

가난한 이파리들의

보이지 않는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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