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동

깃들어 살다

붕어 3 1,280

파릇한 볏잎 위에서

애꿎은 죽임을 당하며

기어코 생을 이어가던

물바구미의 것이었고

 

다섯 치 물 속 빈자리마다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보일 듯 말 듯 살아내던

실지렁이 것이었고

 

물 위의 작은 움직임에도

흠칫 놀라며

모두가 함께 움직이던

물벼룩의 것이었고

 

이 자리 저 자리

유유히 움직이며

경계없는 밥상을 나누던

잠자리, 미꾸라지, 장구애비...

그들의 것이었고

 

밤샘 작업으로

벼들 사이 사이

아침 이슬 흠뻑 잡아내던

거미들의 것이었고

 

논두렁 아래 삶을 찾아

이리 저리 구멍을 뚫던

땅강아지, 두더지의 것이었고

 

가장 먼저 자리를 잡아

가장 늦게 떠나던

개구리와

그들의 뒷다리에 슬며시 붙어살던

거머리의 것이었고...

 

그 모든 생들이

꿋꿋하게 살아낸 가을의 끝자락

하나 둘 고개 숙인 벼들을 베어낸 자리에

그제서야 빼꼼히 자라는

 

내 것이라 생각했던 땅에

나는 다만

깃들어 살아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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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박상화
꾿꾿하게->꿋꿋하게,
내 것이라 생각하는 모든 것에 달라붙는 것이 권력이라는 것일텐데, 그것을 내려놓고 깃들어 살아가는 삶을 받아들이기가 쉽지않은 일이지. 벼가 내 것이니까 농약을 쳐서 생물을 죽이고, 벼가 스스로 자라게 북돋는 것보다 내 뜻대로 자라도록 유도하질 않던가. 농약을 치고, 농사를 지어서 추수한 후에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는 것도 깃들어 사는 것이고, 유기농법도  깃들어 사는 것이며, 자연 그대로 버려두는 농법도 깃들어 사는 것이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 깃들어 살아가는 일일까가 나는 고민이네.
나도 손바닥만한 밭이 있어서 씨를 뿌렸는데, 스스로 자라게 두었더니 배추는 민달팽이가 다 뜯어 먹고 잎사귀 하나도 내 몫으로 남겨주질 않더군. 무는 뿌리는 굵지않고 꽃피고 씨내는 데만 미쳐서 씨만 잔뜩 얻게 되었지. 상추도 꽃이 피고, 고추는 잎만 무성하고, 오이는 두개 달랑, 새끼 손가락만 하고 거친 것뿐이더군. 그나마 토끼도 와서 먹고 가고, 사슴도 와서 먹고 가고. 내건 하나도 안남았지. 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큰다는 말을 실감했네.
아, 민달팽이는 정말 독종이더군. 민달팽이 다 죽인다는 독을 쳐도 소용없고, 밭 테두리에 톱밥을 뿌려도 겨우 두어마리나 죽을까 하고, 그물망을 쳐도 넘어가더군. 가장 좋은 방법은 이쑤시개로 하나씩 적발하여 꿰어 말려 죽이는 방법뿐이라는데, 이게 너무 흉칙한 방법이라 포기했네.
소로우의 <월든>을 읽고, 헬렌 니어링과 스콧 니어링의 책들을 읽으며, 아름다운 전원생활을 동경해마지 않았었지만, 전원은 그야말로 또 다른 정글이었지. 명랑하게 흔들리는 풀들과 싸워야 하고, 잡초를 제거해주지 않을 수 없었으며, 나무도 전지해야만 했었네. 지금은 모두 포기하고, 그냥 놔둔 겨울이지만, 내년엔 또 싸워야 하지. 봄은 전쟁의 시작인게지.
내버려 두면 인간의 시선에선 폐허가 되고, 살자면 잡초나 곤충이나 죽여야 하는데, 그 어느 경계에 깃들어 사는 삶이 있을까가 참 어렵더군. 그냥 남따라 살고, 나는 깃들어 사는 것이라고 자기최면을 거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이건 또 유기농법이나 방치농법을 하는 분들께는 영 씨가 안먹히는 말이지. 머리 아프지만 고민해 보세. 그 고민 속에 깃들어 사는 나가 들어 있긴 할걸세.
좋은 시 잘 읽었네. 총총.
조성웅
첫 문단을 읽다가 어, 주어가 어디갔지 하다가 두 번째 문단, 실지렁이의 것이었고에 이르러 주어도 다  필요없어졌지. 다 그들의 것이었고 마침내 깃들어 사는 우린 그 모두의 것, 이웃이었지.

다만 마지막 두 문단은 갑자기 평범해져 버렸어.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서야 등장하는 '주어'인 땅에 깃든 삶,은 반전처럼 등장해야하지 않을까?
붕어
네, 형님. 좀 더 고민해보겠습니다..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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