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화1968년생 / 편의점

노동자의 깃발

박상화 0 1,146

 

뒷짐 진 노동자가 깃발을 들고 간다.
주방장의 깃발은 칼이고, 농부의 깃발은 호미다.
목수의 깃발은 망치다. 삽이 깃발이고,
스패너가, 테스터기가, 바늘이 깃발이다.

한 노동자가 등에 깃발을 메고 간다.
저 깃발을 따라 길이 난다.
삶이 열리고, 밥이 피어난다.
세상의 따뜻한 모든 것이 차가운 연장에서 일궈진다.
연장에 땀이 떨어지면, 뜨거운 밥이 끓고,
아이의 포만감이 익어 떨어진다.
그 안에서 삶의 밑둥이 굵어 간다.
노동자는 호미를 긁어 밭에서 아이들을 캔다.
망치로 못을 박아 단단하게 세운다.
삽으로 흙을 떠낼 때마다
아이들은 세상의 속살을 배우고,
시침질을 따라 가지런해 진다.

한 노동자가 트럭에 삽과 괭이를 가지런히 세우고 지나간다.
깃발이 저렇게 온 세상에 흩날리고 있던 것을 몰랐다, 나는.
흙탕물이 일어도 곧 맑아지는 것도 눈여겨 두지 못했다.
필요하면, 강가의 굵은 돌도 밀쳐내고
제 길을 만들어 흘러갈 줄 안다는 걸,
몇 닢 낙엽에도 설레어 돌아가는 저 물길을 보면서,
그냥 두어야 하는구나, 물은.
그냥 두어야 하는구나, 온 산 물들이는 잎의 깃발도.

노동자의 등에서 삶의 바람에 나부끼는
지게를 보며, 호미를, 삽을 보며,
날 선 다는건,
흙이 좀 묻었어도, 닳아 뭉툭해져도,
땀을 흘릴 줄 아는 것임을 배운다.
그 힘이 세상을 베어
이랑과 고랑, 세상의 결을 만들고, 잠재우고, 배불리고,
생명을 정화시킨다는 것을.

2018.3.28

노동은 세상을 흐르는 물길이다. 만물을 키우고 살린다. 그 물
길에 물감을 좀 푼다고 세상의 색이 바뀌진 않는다.

식당에서 일을 하다보면, 몇 되지 않는 팀원들끼리도 서열이 생
긴다. 주방장, 부주방장이 제일 높고, 웨이츄레스들 끼리도 서
열이 생기고, 설거지하는 낮은 계급까지, 그 몇 되지도 않는 가
난한 사람들끼리도 계단같은 권력을 다툰다. 팁 몇닢을 가지고
공연한 웃음을 흘리고, 고개를 숙이고, 쥐고 흔들려고 한다.

그런 꼴을 보고 있노라면, 저러니 맨날 당하고 맨날 밑바닥에서
허겁지겁 살지, 하는 생각이 치민다. 단결은 개뿔, 어디서 배운
못된 버릇인지, 두명만 나란히 서도, 쥐고 흔드려는 자, 깔리는
자가 생기는데, 권력의 맛부터 들이는 데, 무슨 단결이고 동지
냐 하는 생각이 치밀어 화가 난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하염없이 수다를 떨며 게으른 웨이츄레스
가 있고, 식탁을 치우는 건 뒷전이고 팁만 세느라 바쁘고, 팁이
적으면 입부터 불쑥 나와 투덜대고 있다. 주방도 일이 몰리면
대강 해서 막 내보낸다. 개판 오분전이다. 그런데도 손님은 들
어오고, 식사를 하고, 식당이 돌아간다.

다시 가만히 보면, 그건, 제 이익을 좀 밀어두고, 벌개진 얼굴
로 열심히 땀흘리는 착한 웨이츄레스와 콩한쪽도 열심히 챙기는
착한 주방장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돕는 착한 주인이 있어서다
. 그 착한 사람들이 전체의 흐름을 만들고, 유지시킨다. 그 많
은 사람들 밥을 먹인다. 그들은 팁을 세는 것보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기위해 애쓰고, 남들보다 자기가 더 게으를까 두려워
하고, 거만하지 않고 어떻게든 조화롭게 흐름을 이어나가려 노
력한다. 그래야 제 일자리를 지키고, 제 일에서 보람을 찾는 것
을 아는 것이다.

잔디밭을 정리하는 직업을 가진 한 노동자가 잔디밭을 정리하는
도구들, 삽과 곡괭이, 갈퀴, 잔디깍는 기계 등속을 잔뜩실은 트
럭을 타고 지나간다. 연장들은 트럭 뒷 좌석에 줄 맞춰 꼿꼿이
서 있었는데,

노동자의 깃발이 저렇게 휘날리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지나갔
다. 썩은 물도, 썩은 잎도 좀 있겟지만, 더 많은 맑은 물과 맑
은 잎들이 강과 숲을 이루고 흘러가겠구나 싶었다. 세상은 열심
히 일하는 착한 사람들이 끌고 가는 것이다.

투잡을 뛰다보니, 바쁘고 피곤하다. 다정한 동인들께 인사도 잘
못한다. 잠깐 들여다 보다, 또 일을 해야한다. 짬도 없고 아무
생각도 안들지만, 손을 베고, 데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나는
더 중요한 걸 배운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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