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화1968년생 / 편의점

가득가득한 겨울

박상화 0 969

 

 


가난하다 가난해도

아궁이 널름불 활활 타올랐고,

무쇠솥뚜껑이 푸푸 뱉던 김은 천정까지 가득했다.

소복눈 고봉고봉 쌓이고,

말자지가 이만하다드라던 고드름 굵디굵어 실했다.

화롯재밑에 숨어 반짝이던 숯불은 먼 별보다 예뻤고, 

볼 빨갛게 절절 끓던 아랫목에선

문풍지 너머 드센 바람소리 하염없이 들렸다.

맹물만 마셔도 죽죽 크던 자잘한 콩들 시루에 가득하고,

긴긴 밤 다 떼먹고 터오던 푸른 새벽도

깜깜한 어머니 머릿수건 앞에선 늘상 지각이었다. 

새벽을 지고 나서던 소입김에

밤그늘 덮고 곤하던 나무들, 뒤척이다 눈더미 푹푹 쏟으면,

늦게 깬 새들 짝짝짝 울었다

쏴아아 요강에 쏟아지던 누이 오줌소리에 깨어

새하얀 눈밭에 오줌으로 가갸겨 쓰다말고

후드득 털고 뛰어 들어오던 쪽마루

벗어던진 고무신 날아가던 벼람박 가득 시래기 다발,

성긴 스웨터 넘나드는 바람에 콧물도 풍년이어서,

훔치다 손등이 터지면 혀로 핥았다.

눈발 날리던 할아버지 상엿길 솔숲 돌 때쯤

길가엔 꽝꽝 얼어 죽은 돌들 가득했고,

가도 가도 종일 손들고 서서 벌 받는 나무들 추워보였다.

골목에서도 알던 밥 끓는 냄새

가득가득하던 그 많은 것들 다 먹고 자랐으나

내 떠나온 길 너무 멀어 돌아갈 수 없는

훌쩍이던 요람의 겨울.


2018.1.30

 

 

* 무엇이 가난했을까. 티비나 냉장고가 없어서, 먹을게 부족해서 가난 했을까. 송피를 벗겨 먹었다던 우리 웃 세대완 달리, 우리 세대만 해도 배고프면 먹을 건 있었다. 밥대신 개떡을 먹고, 찬은 김치나 간장 뿐이어도, 그리 자주 굶고 크진 않았다. 이젠 원하면 하루 다섯끼도 여섯끼도 먹을 수 있지만, 같이 먹던 할머니 숟가락 없고, 숟가락들 하나씩 지워지고, 주고 혼자 먹어야 한다. 티비도 책도 없어서, 명아주, 까마중을 들여다 보았고, 겨울에도 아궁이 불길이나 솥이 푸푸 내뿜던 김, 함박눈, 고드름, 숯불, 콩나물, 시래기에 바람벽, 처마벽, 쪽마루, 검정 고무신도 벗하며 시간을 보낼수 있었고, 그래서 더 많은 것들을 품을 수 있었다.


  아들은 하루종일 컴퓨터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 안에 있는 것들은 만질 수 없고, 어지를 수도 없고, 냄새도 맡을 수 없다. 점프를 하다 잘못 뛰어 떨어져도 아픈 걸 모른다. 눈보라 몰아치는 빙벽에서도 추운 걸 모르고, 생명을 죽여도 무서운 걸 모르고, 먹어도 먹어도 배부른 줄 모르고, 배부르면 입맛이 달아나는 것도 모르고, 손에 쥘 수도 없는 재물을 뾰롱 획득하면 아싸, 아싸 좋아한다. 계절마다 새로운 것들 빼곡하고 환한 계절도 뺏기고, 배부르면 고만 먹는 조절기능도 잃고, 사람과 느낌도 잃었다. 슬픔도 겪어야 이길 수 있는데, 허수인 점수에 기쁘고 뜻대로 안되면 화내는 것만 남았다. 남을 밟을 때만 즐겁고 많이 가질 때만 즐겁다. 한 줌 겨울 볕이 따뜻하고 즐거운 걸 모른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잃어버린 것들, 잏어버리는 것들 이 얼마나 많은가. 가지지 못했을 때만 슬픈 것은 얼마나 부박한가. 은연중 너무 멀리 와서 그 가득가득하던 겨울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시대가 오면 어쩌나.


  문명에 발전이 있다면 좋은 것은 계속 유지하고, 나쁜것은 버리며, 새로운 좋은 것을 더 많이 가지는 것 일텐데, 넓은 아파트는 빈 운동장처럼 쓸쓸하고 큰 차는 내가 차를 끄는 말이라도 된 듯 무겁다면,  돈을 벌러 바삐 쫒기지만, 종일 쫒기다 하루가 다 간다면, 여행을 가서 좋은 것을 보아도 온통 일 생각 뿐이라면, 생의 여유를 추구하는 올바른 자세는 결코 아닐터. 산더미같은 물상에 갇혀 더 가난해진 것이다. 돈이 마누라고 돈이 아이들이 되면, 가난은 공포 그 자체일뿐. 그 공포에 쫒기며 숨이 붙어 있는 것이다. 발전했고 잘 산다고 말하는 것이 가면이고 허세인 것을 싸하게 느끼게 되는 어느 날, 왜 달리는 지도 잊은 쳇바퀴지만 달려보는 수밖에 다른 선택지가 없어져 버린,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린 내가 보이는 날이 있다. 잠깐만 쉬었다가 가도 안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걸 믿지 못해, 부족한 믿음 때문에 쉬지 못하는 홑껍데기가 있다. 매미가 벗어버린 허물을 매미라 부를 것이냐를 고민하던 어린 날의 내가 비친다.


  그때라고 가난의 고통이 왜 없었으랴. 내가 어려서 알지 못했던 것 뿐이지. 같이 가난하면 서로 싸우고 깨부시는게 싫어서 혼자 가난할 것을 택한 현대인의 가난이 그 시절보다 발전이라면 발전일지도 모른다. 싸우는 게 지긋지긋해서 고독사를 택한 것이다.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면서 한발한발 음지를 건넌 시대보다 더 지독해진 외로움. 그러니 인간은 원래 외로운 존재라는 걸 알아야 한다는 철학의 발전은 위로가 되질 못한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왜 인간은 고립되기만 하는지 새겨볼 필요가 있다. 싫은 것, 지긋지긋한 것의 이면에는 좋은 것도 있었다는 것을. 그 우장창장 깨지던 가난의 이면에도 좋은 것이 있었을까.


구멍 숭숭해 언제나 춥던 낡은 스웨터와 함께 버려졌을 그리운 것들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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