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화1968년생 / 편의점

​겨울 숲

박상화 6 2,459

 



더 갈 데 없어 발끝에 선 나무들,

검은 뼈, 굳어버린 잿빛 혈관만 빼곡한 하늘,

언 돌들 끌어안고 울다, 같이 얼어버린 계곡,

숨 죽여,

숨 죽여 내리다 거미줄에 걸린 눈송이,

이 차가운 침묵의 결계에서

나는 어떤 거미줄에 걸린 눈송이인지

헝클어진 사이,

문득 햇살이 성큼 숲에 들었다, 갑자기

얼음 밑 자글자글 흐르고,

굳은 가지 푸드덕 날았다.

볕이 한 뼘만 있어도 살 것 같다고

생기가 돌았다.

살고 죽는 일이 언제나 한 뼘이었다.

저 나무들은

선 곳이 언제나 끝이었다



 

 

* 나는 시가 뭔지 모르겠다. 그러니 오십 고개 넘도록 문청이겠지. 삼십, 사십엔 아직도 문청이냔 소리가 부끄럽기도 했는데, 오십이 넘으니 그것도 청년이라 좋기만 하다. 칠십되도록 문청 해야지. 공식적인 청년이 아닌가.


마음이 답답해 쓰기 시작한 게 끌적끌적 문청짓만 35년차,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고, 문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라, 쓰는 게 뭔지도 모르고 깜깜하게 살아왔으니, 신춘문예는 감히 응모해 본 적도 없고, 전태일문학상과 조영관 문학상에 신인 응모해봤다가 뚝 떨어진 뒤론, 저건 시어서 못 먹는 포도라고 여기고 살았다. 재주 없고 천성이 미련한 걸 어쩌랴.


괘안타. 아무도 안 읽어줘도 내가 읽었고, 아무도 평하지 않았어도 내가 평했다. 나도 모르겠는 걸 남에게 디미는 것도 괴로울 것이다. 시집을 내 주겠다 하시는데, 내 꼬라지가 영 아니다 싶어 거절해버린 일은 죄송할 따름이다. 해가 지났으나, 그래도 아직 아니다. 잘 모르지만 아니다. 눈은 높고 발은 낮으니 엎드리지 않으면 내 발을 보지 못할 것이다. 


돈도 못 벌고 글도 그지같고 막막하던 마음, 접시딲이 갖다오니 기분이 좋아져서 아무도 묻지 않은 고백을 쓴다. 몸은 피곤하지만, 일을 하니 살 것 같다. 일을 못하게 되어 괴로운 페친들껜 죄송하지만, 일을 하니 살 것 같은 날이 곧 오시리라 믿는다. 돈을 벌어서가 아니다. 접시 닦는 걸 배우러 다니는 무급 접시딲이지만, 그래도 기분 좋단 그 말이다. 오십 넘으니 글을 쓰는 게 문학만은 아니구나 하는 걸 알겠다. 눈 뜨고 잘 때까지 일하게 되어 다정하신 페친들께 소홀하게 되었단 말을 이렇게 어렵게 한다. 늘 그랬지만 참 지지부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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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박소천
저와 너무 똑같은 처지(?)아니면 동병상련이랄까요!
다만 시는 저하고 좀 다른 것같습니다. 물론 호불호를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분들의 시평을 할 깜은 못되고요 그냥 감상합니다.
며칠전에 들어와서 올린시 다 잘 감상했습니다.
오늘 시도 참 좋습니다.
다만 제가 본바로 주제넘게 생각지 않으신다면 몇 편의 시에서 '홈리스'라는 시어가 목에
가시처럼 걸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물론 제입장 일 뿐입니다)
모쪼록 기분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고요
좋은 글 계속 볼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박상화
오랜만에 뵙습니다. 감사합니다.
홈리스라는 시어가 왜 목에 걸리시는지는 알수 없습니다만, 제가 미국에서 살고 있다보니 집을 잃고 떠도는 거지들을 지칭하는 이쪽 용어가 그렇습니다. 전나무라 하고, 기차라고 하듯 그저 있는 단어이기 때문에 따로 의미를 두는 단어는 아닌데, 한국에선 요즘 뭐라고 부르는 지 모르겟습니다.
시골에서 구멍가게를 하다보니, 매일 이들과 부딪히는게 일이라, 이 단어를 빼고 생활이 안될 정도입니다.
혹시 왜 불편하셨는지 설명해 주시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좋은 말씀, 기분 상하진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
박소천
예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외국에 계신다는 말씀에 많이 놀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구수하고 향토적인 시어라니...

먼저 왜 홈리스가 저에게 어색했는가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조금 과하게 표현하자면 동양화에 에펠탑이나 자유여신상이
있는 듯한, 수채화에 유화가 섞이지 못한채로 동그라니
있는 듯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어감 상으로도 팔월처서와 홈리스가 그렇고요.
간장내 나는 홈리스는 간장내 나는 누더기 옷으로도(이것은
그냥 예문, 이보다 좋은 표현이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다만 예를 들기 위한 것일뿐) 말씀하시고자 하는 홈리스의
시어를 충분히 표현되겠기에 어떨가 싶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무난하다고 생각 된 것이 먼지에 나오는 홈리스였지만...

박상화시인께서 쓰시는 시어들이 한국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토속적이면서 향토적이고 구수한 아름다운 표현을 많이
쓰십니다. 가령 전통재래시장에서 막걸리를 얻어먹고
동전을 구걸하며 누더기옷을 입은 사람에게 우리는 거지라던지
노숙자라고 부르지 홈리스라고 하지않을 것입니다.
홈리스라는 말이 시어가 되지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일테면 LA 뒷골목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마약전쟁과
마천루같은 빌딩숲 지하에서 지렁이처럼 겨우 숨을 뱉으며
나오는 홈리스라면 여러가지나 이미지나 배경들로 해서
오히려 거지나 노숙자보다 홈리스가 더 적절한
시어가 되지 않겠습니까?

시평이라기보다 그냥 저의 느낌정도로
생각하시면서 읽으주셨기를...


우리나라에서는 홈리스를 거지나 노숙자로 표현하겠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라면 거지라 할 것이고 주로 노숙자로
많이 사용됩니다.
박상화
고맙습니다. 한국에 계신 분이 이질감을 느끼더라도 저는 제 선자리에서 시를 쓸 수 밖에 없으니, 표현이 그렇게 될수밖에 없지 않은가 싶습니다. 제가 한국에 잇을 때 쓴 시에는 노숙자로 표현을 햇는데, 한국의 노숙자와 미국의 홈리스는 같은 거 같아도 다를 수 밖에 없는 점들이 잇을 거 같습니다. 아마도 해외문학이라는 범주로 묶이는 글들이, 연변동포들의 시라든가, 미주동포의 시가, 그런 형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같은 한글을 사용해도 느낌이 다를 수 밖에 없지요. 그러니 말씀하신 시어의 적절함이 홈리스가 맞습니다.

그런다고 시어를 다 영어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라, 꼭 필요하지 않으면 한국의 언어로 쓰곤 하는데, 모국어의 정서를 잊지 않고 싶어서 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느껴지는 이질감은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해외에 살다보니.

정성스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자주 뵙기를 청합니다.
박소천
감상은 독자의 몫입니다. 그리고 주관적 일 수밖에 없고요.
시를 쓰는 시인은 객관적인 공감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시를 쓰지만 자신만의 시어와 표현이 있기에 또한 주관적 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좋은시라도 절대적 공감은 없습니다.


문화와 관습 습성 언어와 사회적 시스템...
동질과 이질의 차이를 한 번 생각해보았습니다.

너절한 소리에 일일이 댓글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좋은시 부탁드립니다.
박상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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