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화1968년생 / 편의점

​소주 행장기

박상화 0 1,237

 

 

처음으로 소주 한병 사던 날을 기억하시는가

소주를 따르되 잔을 가늠하지 못하여, 

   따르고 또 따라서 잔을 채우던 서툴던 날의 풍경을. 

한번에 잔의 7부를 능숙하게 채워 마시게 될 때 쯤은, 

   고양이처럼 푸르고 개처럼 쏘다니던 청춘이었지. 

빗속에서 잔의 9부를 채워 마시던 날은,

   차면 넘치고, 

   혼자 마시는 소주맛은 좀 더 쓰다는 걸 배워가던 사회초년의 날들.  

소주의 힘을 빌려 고백을 하고 장가를 들고보니, 

   잔의 9부를 채우고 첨잔을 하는데, 

   소주의 표면장력을 이용하여 봉긋하니 고봉잔을 만들어 

   제사를 지낸 연후에, 고개를 돌려 수굿이 한잔 마시는 날이 있었네

   전차처럼 돌진하면 고지를 정복할 수 있다고 믿던 날들.

소주 반병을 한컵에 따라 마시기 시작하던 건, 

   시간에 쫒겨 바쁘기만 했던 중년의 가을날이었어. 

아무리 둘러봐도 곁에 사람이 없던 반백의 장년에는

   잔도 생략하기로 했지,

   예의와 격식은 사람이 있을 때 차리는 밥상같은 거라면서. 

취기없이 시간이 흘러가지 않던 노년에는, 

   먼지나는 주머니 돈으로 조금이라도 더 마시려고 

   댓병으로 바꿔 아쉬워하며 아껴 마시더니, 

간밤의 숙취로 속아픈 아침이면 해장소주로 몸을 속여야 했네.

지겹도록 길었던 여정도 거진 마무리가 될 때 쯤엔, 

    노구에 보약은 이것 뿐이라고

    삼시세끼 밥대신 자시며 몸을 비우시더니, 

늦은 밤, 문상길에 보았네

알전구 주렁주렁 불 환하게 밝히고 삼삼오오 둘러앉아

제각기 한 잔씩 들고 추모하던

한없이 맑고 투명한 소주잔들을. 

 

 

2014.10.24

 

*돌아가신 분의 일생을 정리한 글을 행장기라고 합니다. 

 

소주 1단 : 서툴게 소주를 마신다. 입주 立酒

소주 2단 : 능숙하게 잔을 채워 마신다. 능주 能酒

소주 3단 : 혼자 마시는 소주 맛을 안다. 독주 獨酒

소주 4단 : 넘치지 않게 첨잔을 할 줄 안다. 제주 祭酒

소주 5단: 시간에 쫒겨도 마신다. 시주 時酒

소주 6단 : 물 마시듯 마신다. 이 때부터는 다른 술과 섞어 먹지 않고 순수하게 소주만 마신다. 순정주 純精酒

소주 7단 : 소주가 줄어드는 것을 몹시 아쉬워 한다. 소주를 사랑한다. 애주 愛酒

소주 8단 : 몸이 망가져도 소주를 마신다. 망주 亡酒

소주 9단 : 밥 대신 마신다. 식주 食酒

9단 이상은 사후 세계의 일이므로 논하지 않는다.  

 

이 단 구분은 제가 해 본 것입니다. 일찌기 조동탁선생의 주도9단이 유명합니다. 저도 이제 40이 넘었으니, 소주를 깔고 온 길들을 반추해 보면서, 유치하지만, 한번 적어 보았습니다. 저는 겨우 독주의 수준이지만, 주변에 9단 이상분들을 워낙 많이 봐온 지라, 그 독한 희석식 화학주에 기댈 수 밖에 없었던 남루에 대한 애잔함이 이런 행장기를 한줄 적게 했습니다. 놀고 앉았다 미워하지 마시기를 바라나, 이 한줄로 그 욕을 피할 수 없음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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