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화1968년생 / 편의점

시래기

박상화 4 1,367

 

 

 

가지도 멈추지도 못하는 날 있지.

굳은 새처럼 가만히 굳은 날, 죽어라 달려도 닿지 못하는 날,

형님의 사진에서 말라가는 시래기를 들여다보다

시든 줄기조차 부러진 시래기가 남몰래

깊은 맛을 품어 간 것을 생각하였네.


허공의 냉기와 그늘 속에서 시들고,

빡빡 문질러져 단단하던 줄기마저 꺾이고,

제 지니었던 억센 천성 다 빼앗기면서,

시들시들 시들어 간 시래기가 오래오래

물기를 말려가며 품어온

맛이라는 게 있었던 것을 생각하였지.


비로소 제 속을 풀어내고 연해진 시래기가

뜨거운 국물이 되어 얼어버린 빈속으로 들어가면서

밥은 꼭 먹고 다니라고

살아있으면 맛이 나는 날도 있다고

아픈 창자도 짜르르 훑어주고

시든 등도 쓱쓱 쓸어주던 것을 기억했어.


이제 끝이다 싶을 때 몽우리 툭 터트리는 게 꽃이야.

살 찢어져 꽃은 피고, 입안 헐어 꽃이 피고,

신경이 온통 터진 꽃에 집중된 그 순간에,

살아야겠다는 이름의 꽃이 피더라.


시들시들 시들어 가더라도 남몰래 품은

맛은 잊지 말라고

뜨거운 시래깃국에 성가시게 찬 눈을 말아 먹으면서

눈송이처럼 뜨거워지는 것도 있다는 것을

사진 한 장 들여다보며 생각하고 생각하였어.



2017.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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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박상화
시래기(수정본)

 
냉기와 그늘 속에서 시들고,
제 지니었던 억센 천성 다 빼앗기면서,
시든 줄기조차 부러진 시래기가 남몰래
깊은 맛 품어 간 것.

비로소 제 속을 풀어내고 연해진 시래기가
뜨거운 국물이 되어 얼어버린 빈속으로 들어가면서
밥은 꼭 먹고 다니라고
살아있으면 맛이 나는 날도 있다고
아픈 창자도 짜르르 훑어주고
시든 등도 쓱쓱 쓸어주었던 것.

이제 끝이라고 입안 헐어 꽃필 때,
시들시들 시들어 가면서도 남몰래 품은
살아야겠다는 그 맛,

뜨거운 시래깃국에 성가시게 찬 눈을 말아 먹으면
눈송이처럼 뜨거워지는 것도 있다는 것.


2017.11.28
박상화
위에 것은 설명조고, 수정본은 더 시적이겠지만, 시적인 것이 꼭 더 좋은가.. 고민중..
조성웅
가지도 멈추지도 못하는 날 있지/굳은 새처럼 가만히 굳은 날, 죽어라 달려도 닿지 못하는 날//시든 줄기조차 부러진 시래기가 남몰래
깊은 맛을 품어 간 것을 생각하였네// 난 1연의 1,2행은 꼭 살렸으면 좋겠어. 1연의 1,2행이야말로 이 시의 시적인 힘의 뿌리가 아닐까 생각해.
박상화
응. 며칠 생각해 봣는데, 원본이 아무래도 더 나아. 다만 다소 장황한듯하여 두고 고민해볼까 싶네.시를 말하는 사람들은 수정본을 낫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축약이 요즘 시를 베리고 잇단 생각을 버릴수가 없네. 군살을 빼되, 더 쉽게 들리도록 빼야지 말을 자꾸 감추어선 식자들의 시밖에 안된다는게 요즘 고민지점이야. 지나치게 은유에만 의존하는 경향, 은유가 시를 감탄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식상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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