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화1968년생 / 편의점

​마흔 아홉, 쉰

박상화 0 1,265

<​마흔 아홉, 쉰>

 

눈 내리는 땅에 아버님 두고 돌아섰지
낯선 땅 멀리멀리 떠돌다 돌아보면
먼 언덕에 눈 맞고 서 계시네

눈 내리는 땅에 어머님 두고 돌아섰지
무리에서 떨어진 늑대처럼 외로우면
하얗게 눈 쓰고 따라 오시네

밥 먹고 놀아라
금방이라도 이름 부르실
그 골목 그 담벼락 밑 그 문간 언저리에서
사십년을 서성였네
한 발짝도 멀어지지 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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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늑대와 같아서 무리생활을 해야한다. 혼자서는 못 산다. 무리생활은 위험을 분담하는 방편이어서 무리에서 떨어지면 위험해 진다. 그 무리가 평생을 가고, 무리의 구역이 평생을 간다. 만나는 사람의 품성이나 마음두고 하는 일이 평생 똑같다는 말이고, 그 무리나 그 구역을 벗어나면 외로워 진다. 사람은 바뀌어도 만나는 사람의 품성은 바뀌지 않는다. 그건 내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외롭다는 건 위험하다는 말이다. 편안하지 않고 날 서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스스로 지키지 못하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말이다.

코흘리던 어린 날에 늘상 같이 놀던 동무들이 나만 빼고 저들끼리 모험을 떠난다거나 하면, 예를 들면, 안양시장통의 코찔찔이 친구들이 안양유원지까지 모험을 떠나는데 마침 내가 안보여 저들끼리 갔다고 하면, 혼자 무척 심심한 한나절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 담벼락에 기대 심심하면서도 해가 져야 집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뱅뱅 돌던 그 구역을 혼자 벗어날 생각은 못하고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다.

좀 더 커서는, 예를 들어 간현유원지로 놀러간 친구들을 찾아 혼자 늦은 비둘기호를 타고 도착했을 때, 간현유원지가 안양유원지처럼 외길인 줄 알았는데 가보니 손가락처럼 여러갈래 길이고, 핸드폰도 삐삐도 없던 시절에, 어느 갈래로인가 분명히 친구들은 들어가 민박을 정하고 있는 것만 알 때, 수중에 돈은 저 강 건널 배삯 밖에 없을 때, 다섯갈래 길중 아무길이나 하나 정해 물 건너고 고개넘으며 두시간을 걷다가,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외딴 산속에서 혼자 밤을 맞이하게 된 날에, 먼 불빛의 농가에 가서 헛간이라도 빌려달랠까 궁리를 하며 걷다가, 캄캄적막한 산중 물가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있던 내 친구들을 문득 만났을 때,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었다. 거기는 유원지를 지나 산을 넘어 구비구비 먼 뒷동네였는데, 저들도 오다보니 거기였더라했고, 무슨 귀신이 씌여 그랬는지 지금도 모르겠으나, 그 놀라움과 놀라움과 놀라움으로 나는 그 무리와 평생 동행을 하게 된 것이다. 그때 읽었던 '시여, 침을 뱉어라'는 무슨 내용이었는지 잊었어도, 그날 무리와 재회한 환희는 문장보다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같이 막걸리를 마시던 사람들이 하필 공안이어서 어느날 문득 끌려갔고, 조사를 하던 사람들이 하필 실적이 좀 필요한 사람들이었어서 굴비에 멸치끼듯 엮여 국가의 공밥을 몇달 먹고 나왔는데, 이제 그들은 모두 먹고 사는 곳으로 흩어져 갔고, 그때는 너무 어려서 세상이 뭔지도 모를 사람들이었어서, 공밥을 먹은 게 좀 억울해서, 뭤땜에 그랬는지 알고 싶어서, 그런 만가지 이유로 그 언저리를 서성이다보니 서성이는게 습관이 되어 아직도 서성이기만 하고 있는데, 어느날인가 나의 운명에 화살이 되어 갈 결기는 없는 사람인 걸 알게 되고, 끝도 없이 쓰던 연서가 가식으로 가득한 것이었음도 깨닫고 만 것인데, 서성이던 버릇만 버리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싶기도 했던 것이다.

마흔 아홉을 지나 쉰인지, 아직 마흔 아홉인지, 혹시 마흔 여덟은 아닌지, 마흔 서너살부터는 나이를 기억하지 못하고 산다. 기억하기 싫었는지, 의미가 없었는지. 갱년기가 오는지 아무것도 의미없고, 모든게 싫어져서 이대로 마냥 몇년이고 손을 놓아보리라며 감정이 하는 대로 가만두고 지켜보았는데, 한달을 못가 제자리를 뱅뱅 돌고 있는 걸 알았다. 사람은 누구나 묶인 강아지처럼 제 자리가 있고, 그 구역, 그 무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처럼, 사람의 자리와 무리도 바뀌지 않는다. 새롭고 묘한 것을 얻은 양 기쁠때도 며칠지나 보면 다 그 자리 그것이다.

손을 놓고 한달만에 이상하였다. 만사가 싫고 모든 에너지가 다 빠진 것 같더니, 꾸물꾸물 다시 움직인다. 일을 하게 된다. 이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 걸까. 왜 다시 제 자리를 챙기게 만드는 걸까. 세상에게 수없이 찔린 칼자국 갯수만큼 죽어주리라고 째라고 누웠으나, 가도 멀리 못간다는 걸 알았다. 사람이란게 그릇과 똑같아서 차면 넘치고, 비우면 차게 마련이다. 겨우 멀리 가봐야 안양4동에서 안양5동 새로운 만화가게나 찾아가는 게 최대치였고, 무리와 구역을 벗어나려해도 더 멀어지지 못하는 건 몸이 마음자리를 중심으로 돌기 때문이고, 그러한 습성은 사십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무리에서 멀어져 상처받은 늑대들, 제 구역을 벗어나 떠도는 늑대들, 다 돌아가게 되리라. 누구나 갈 데가 거기 밖에 없다. 마음 있는 곳. 행복한 사람들이 불편하고, 지지고 볶던 괴로움이 그리워지고 보니, 행복의 실체는 지겨움이고 심심함이고 괴로움이었던 것도 알게 되었다. 울다 부은 눈두덩이조차 그리워질것을 생각하면. 어느날 바람에 날리던 비닐봉지가 나였던 것을 생각하면. 벗들과의 술자리가 문득 외로웠으니, 혼자 마시는 술도 흥성하여야 공평하지 않은가. 살다보면, 골짝을 울리는 개소리를 귀기울여 듣는 현자도 다시 만나게 되리니. (한번 새벽길에 스쳐지나간 인연이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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