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화/ 1968년생 / 편의점
하피첩
문 밖에 눈 오는데 발자국 없다
낮은 처마에 시린 눈 얼고
나무들 어둠에 섰다
흐린 불빛에 날리는 마음 드러나고
켜켜이 덮이는 눈에 긴 그림자 묻을 수 없어
다산도 이런 밤에 글을 썼겠지
긴긴 밤 한 자 한 자 눈이 오는데
비단치마 자르는 소리 하염없이 쌓인다
문 밖에 눈 오는데 그치지 않는다
돌아보면 양파껍질처럼 슬프고
겹겹 외투 다 벗고나니 아무것도 없다
소리를 감추어도 흐린 불빛에 들키는 눈물
발시린 긴 그림자 묻을 데 없어
함께 짜던 비단치마 잘라 책을 엮으니
긴긴 밤 한 자 한 자 눈이 오는데
고운 발자국 소리 하염없이 쌓인다
긴긴 밤 한 자 한 자 눈이 오는데, 먼 이국 땅에서 먼 조선시대의 정약용에게까지 네 마음이 닿을 수 있다니, 네 '날리는 마음'의 폭과 넓이를 가늠하기가 힘들구나.
겹겹 외투 다 벗고나니 아무 것도 없는, 투명한 맨 몸으로, 이주노동자로 트럼프 시대의 개막을 보는 네 심정을 헤아린다.
네 속울음 드러내지도 못하고 쉬이 들키지 않을 네 눈물 이리 전해주니 고맙다.
네 눈물 자욱 한 자 한 자 헤아리다 보면,
그렇게 고운 발자국 소리에 쏠리는 네 마음을 조금은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