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화1968년생 / 편의점

첫 눈

박상화 0 1,164

 

 

 

길가엔 목줄 붙잡고 선 전봇대가 졸고

손님 끊긴 가게 안엔 내가 조는데

눈 온다, 눈 온다, 첫 눈이다

꼬리 짧은 강아지처럼 반가운 소리

백만송이, 이백만송이 하얗게 쌓여

온 세상 깨끗이 새도배했으면 좋으련만

팔짱끼고 옹치고 앉아

먼 그리운 소식 샛눈뜨고 들여다 보다

담배 한 대 타오르는 어둠속에서 

진동하는 백만의 소리를 듣는다

 

눈으로 희게 덮어도 좋고

첫눈은 진눈깨비로 녹아 얼어도 좋다

나무는 갈라지며 벋고

물은 합치며 가는 것이다

바위는 뭉치며 단단하고

하늘은 흩어지며 커지지 않는가

흙을 돋우면 쌀이 되고

자주 밟히는 곳엔 반드시 길이 나듯이

어떻든 염원이 삶을 만드는 것이다

나는 용접공처럼 시간을 이어붙이며

기나긴 길도

걸음들이 이어져 만들어지는 것을 생각한다

 

땀방울 맺힌 곳에만 먹을 것이 열리니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 땀방울 뿐이고

모든 곳에 전투가 있으니 어찌 대첩만 기록할 것인가

임진왜란때도 그랬을 것이다

이 땅의 흙들은 어디서든 싸웠을 것이다

이름을 남기는 대신 나막신 벗어 빰따귀를 후려갈기고

첫눈아래 죽어간 조상도 있었을 것이다

무명이 땅을 지키고

무명이 흙으로 돌아가 흙으로 남았다

어떤 전투도 조선과 왜의 싸움이었으니

지금도 모든 전투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싸움

 

내 안의 싸움이든

우리끼리 싸움이든

모르고 적을 이롭게 한 싸움이든

싸우는 한은 굴종이 아니다

싸우는 한은 진 것이 아니다

내리는 눈에게 무슨 작전이 있으랴

첫눈이 깔아논 냉기가 있어야 함박눈은 와서 쌓이는 것이니

바람에 부대끼는 쫒겨난 자의 텐트마다

백만의 함성처럼

첫 눈은 그렇게 설레며 오고 있을 것이다

 

 

2016.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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