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화/ 1968년생 / 편의점
아침녘, 보리논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허리를 펴니,
신작로 길을 따라 7명이 한쪽 손을 엮인채
낯 익은 순경을 따라 걸어가다가
이리오라 손짓을 하는데, 아버지셨죠
아버지는 종이지갑을 건네주고
말씀이 없으셨어요
돌아서
뿌연 신작로 굽이져 더는 보이지 않는 데까지
하염없이 걸어가셨지요
살구재 넘어 안계지서까지 황톳길 40리
묵묵히 끌려가신 아버지
그 먼 아버지의 뒷모습이
마지막이었어요
그날,
그리고 다음날
또 다음날, 그 다음날
기다려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으시고
마지막인줄 알았더라면 따라 갔을 것을
아버지가 도망갔으면
우리가 죽었겠지요
빨갱이 자식이라는 손짓과
눈빛에 쫒겨
마루 밑에 숨어 살아온 세월
우리를 살리려고 죽은
아버지 젯상을 차리는데 60년이 걸렸어요
침묵하고
침묵하고
침묵하고 살아야 했어요
손주가 교사임용에 탈락했을 때도
짐작했지요, 입을 다물고
목을 타고 넘어 흐르는 강물을
꾹꾹 삼켰지요
살아서 언젠가
아버지 얘기를 할 날을 기다리며
60년을 기다리며
참았어요, 오늘
처음으로 차린 아버지 제삿상 앞에서
마흔셋 아버지 두툼한 손으로
열일곱 더벅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그날을 꺼내고
그날 보리논에 불던 더운 바람도 꺼내 올리고
엎드려
한참을 울었어요
아버지
죽으러 가는 줄도 몰랐던
열일곱살 어린 아들이 되어
열일곱살로부터 60년이 지난
열일곱살 어린 아들이 되어
2016.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