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화1968년생 / 편의점

​동지冬至

박상화 0 1,146

 

 

 

운이 좋으면 만날지도 몰라.

겨울 햇살을 한짐 해 지고 

자박자박 집으로 걸어가는 내 앞에

흰 가지 부채살처럼 쫙쫙 펼치고 선 

큰 나무가

빛을 뿜으며 기다리는 모습을.

 

햇살은 겨울이어서 좋지

큰 나무는 빛을 뿜고

나는 빛조차 가라 앉는 침묵으로

자박자박 큰 나무 곁을 지나가겠지.

 

운이 좋으면 만나질지도 몰라.

겨울 햇살을 한 보따리 품어 안고

절뚝절뚝 집으로 걸어가는 내 앞에

냇가에 부딪치는 물들이

반짝반짝 햇살을 튕기며 말 걸어오는 모습을.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어서

냇물은 햇살을 튕기고

나는 빛조차 숨어드는 그림자로

절뚝절뚝 냇가를 지나가겠지.

 

마음은 하냥 서럽고

지쳐 너덜너덜하지만

나는 잠깐 쉬었다 갈 수가 없네.

- 저 모퉁이만 돌면 집일지도 몰라

자춤발이 마음보다 바쁘게

해가 지니까.

 

 

2015.12.14

 

 

* 한국에 살 땐 동지가 그렇게 의미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인지, 동지인지 그저 밤 11시, 12시나 되어야 집으로 갈 수 있었으니까요. 

여기는 북위 47도 36분, 저녁 4시면 벌써 사방이 깜깜해지는 동네입니다. 밤 10시까지 가게문을 열고 있는데, 창너머 어둠이 짙어지면, 손님도 끊기고 멀리 초승달 짖는 소리만 고요합니다. 

 

겨울엔 춥고, 비바람이 많이 와요. 다니는 사람이 없으니, 겨울은 장사가 참 안됩니다. 그래도 세금은 여름, 겨울을 가리지 않으니, 너덜너덜해지도록 장부를 들여다 보고, 카드 밑장을 빼서 돌려막기하는 기술만 타짜 뺨치게 늡니다. 그래도 못 막는 날은 꼬박꼬박 저며오는 벌금을 물고, 적시에 국가를 먹여 살리지 못한 게으름을 지탄당하며, 멍이 들지요.

 

그렇게 긴긴 겨울은 삭은 어깨를 점령하고 떠나주질 않습니다. 추운 밖에서 일하는 손님들은 저를 이지머니(easy money)라고 부르는데, 저도 그렇게 쉽게 돈을 벌진 않습니다. 애타게 기다려서 버는 돈인데, 그들은 춥지 않은 실내에서 일하는 제가 부럽고, 저는 거칠게 벌어 스스로를 위해 돈을 쓰는 그들의 호방함이 부럽지요. 서로 사정도 모르고 부러워만 하는 겁니다. 남 등쳐서 버는 게 아닌한은, 세상에 춥지 않은 돈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런데, 추수감사절과 성탄절 때문에 미국의 겨울은 더 돈이 안돕니다. 큰 명절이라, 가족친지를 위해 선물을 사고 반짝이는 트리로 집을 꾸미느라 돈을 써야하기 때문에, 겨울돈은 전부 대형 쇼핑몰로 몰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월초부터 손님들은 담배 두갑을 한갑으로 줄이고, 술 두캔 값을 아낍니다. 겨울을 반짝반짝하게 나기 위해서, 사람들은 구멍가게에서 아낀 돈을 들고 월마트나, 홈디포 같은 대형 쇼핑몰로 갑니다. 그리고 또 빚도 집니다. 잠깐 반짝하려고 오래 꺼져있는 전구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해부턴가 동지冬至를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동지가 지나면 매일매일 해가 쭉쭉 길어지는게 보입니다. 동지는 또 12월 22일경이라, 동지가 지나면 돈이 하늘로 가는 성탄절도 끝나고, 놀자,먹자,체면차리자가 끝나고 새해가 됩니다. 그럼 장사도 해길이만큼 조금씩 나아집니다. 

 

긴긴 겨울밤, 어둠 속에 뜬 섬같은 가게 안에 앉아서 한국 소식을 봅니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거리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많이 보여서 덩달아 우울해 집니다. 어떤 이는 집떠난지 7년째고, 어떤이는 8년째고 손으로 꼽아 세기 어려운 나날들입니다. 빛조차 가라앉는 그들의 침묵과 빛조차 숨어드는 그들의 그림자가 길고도 긴 세상, 자춤발이처럼 절뚝거리며 가는 많은 사람들 마음보다 바쁘게 해가 집니다. 

 

집은 따뜻한 곳이고, 가야만 하는 곳입니다. 어려서 집을 떠났지만, 결국 사람이 가는 길의 끝에 있는 것은 집입니다. 그러니 쉬어갈 수가 없습니다. 저 모퉁이만 돌면 집일 것 같은 나날들이 계속 이어집니다. 너덜너덜 하지만, 쉴 수가 없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이니까요. 

 

그러니, 힘냅시다. 아직도 처음인 것처럼, 매일을 첫날인 것처럼 싸우는 사람들이 또 있으니, 내 친구들 모두와 같이 나도 그렇게 힘 내기를 바랍니다.

 

** 미국에선 동지를 '겨울의 첫날 first day of winter'이라고 부릅니다. 알고보니, 점점 깊어가던 밤은 가을이었던 거죠. 겨울의 첫날부터는 점점 날이 밝아오는 것이니, 겨울이란 그렇게 암울한 시간만은 아닌 것입니다. 모든 새로운 것은 겨울로부터 옵니다. 가을이 거두고 죽는 계절이라면, 겨울은 '죽어있는'계절이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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