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화/ 1968년생 / 편의점
그대는
냉기와 숨막힘과 모자람을 견디고
그리고 또 무엇을 견뎠는지 아득한 시간,
시간을 견딥니다.
그대의 동아冬芽 안에서
겨울 비바람보다 더 혹독한
삶을 견디는 그대여,
지친 그대에게서
싹이 날 것입니다
견뎌 온 일들의 힘으로 자란
애싹이
그대의 등을 뚫고 돋아날 것입니다
그것이 견디는 자의 힘입니다.
2016.1.30
동아冬芽 : 식물의 겨울눈. 가을에 나서 겨울을 견디고 봄에 싹을 틔운다.
<동아冬芽에게>
어떤 애기싹들은 겨울을 버티는데
그것을 동아冬芽라고 합니다.
동아는 한벌의 겨울 외투, 아린芽鱗을 입고
잎이 떨어져 남긴 엽흔葉痕을 보며
어린 가지 끝, 가장 위태로운 자리에서 홀로 겨울을 견딥니다.
잎은 사랑한다는 흔적을 남기고
먼 지상으로 떨어져 갔지만,
그대는 잎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고시원처럼 비좁은 동아冬芽의 방에서
그대는
서리와 눈과 얼음의 냉기를 견디고
언 단단함과 숨막힘,
코끝을 베는 날카로운 웃풍과
작은 그 방조차 날려버리려는 미친 바람을 견디고
찾는 이 하나없는 긴 밤과
모자란 물 한모금을 견디고
그리고 또 무엇을 견뎠는지 아득한 시간時間,
시간을 견딥니다.
견디고 난 힘으로 돋아나는 애싹이
여린 연두빛인 것은
견디느라 지친 때문이겠지만
싹을 밀어 올릴 힘과 스스로 빛을 내는 힘은
오로지 견딤으로써 생기는 힘입니다.
견디는 건 지치는 일이지만
견뎌 온 만큼 더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과정입니다
고시원의 방이기도 하고
굴뚝, 전광판, 크레인, 공장 위의 고공농성장이기도 하고
관청 앞이나 길가 작은 천막이기도 한
또는 텅빈 사무실이거나 인부숙소인
심지어 길가의 박스이기도 한
그대의 동아冬芽 안에서
겨울 비바람보다 더 혹독한
삶을 견디는 그대여,
버티고 살아야 싹이 돋는 것입니다.
베이고 지친 그대에게서 싹이 날 것입니다
견뎌 온 일들의 힘으로 자란
애싹이
그대의 등을 뚫고 돋아날 것입니다
그것이 견디는 자의 힘입니다.
2016.1.30
아린(芽鱗) : 동아를 싸고 연한부분을 보호하는 비늘조각. 예) 목련 동아의 털부분
엽흔葉痕, 엽인葉印 : 잎자루가 떨어져 나간 흔적, 보통 하트모양
다시 읽어봐도 좀 길고, 어수선했습니다. 아린같은 경우는 방과도 중복되고, 동아와도 중복되고, 굳이 넣어서 하는 일이 딱히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줄였습니다. 가지를 치고, 요점만 썼습니다. 원래 이 글의 요점은 "견뎌 온 일들의 힘으로 자란"이었습니다. 고통스럽지만, 견디면서 생기는 힘이 있습니다. 그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견디는 것이 옳은가 여부는 따지지 않기로 했습니다. 견딜 수 밖에 없고, 견디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인 경우에 대해서만 쓴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다른 길이 있다면 더 좋을 수도 있겠지만, 견딤으로서만 가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동아는 견디다 지쳐 죽은 싹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식물은 껍질 속에 숨어 보이지 않던 잠아潛芽를 키워 내 놓습니다. 가지가 잘려 죽을 경우에는 숨어있던 대안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잠아가 나올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았을 때만 그렇습니다. 미리 포기하고 시들면 잠아도 나올 수 없습니다.
누군가 제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좀 좋아질거라는 전망도 잇다고. 그러나, 살아있어야 살아나는 거지, 죽으면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그러니 버텨야 한다고. 봄이 오길 기다리며 동아를 준비한 식물들에게 봄은 영영 안 올 수도 있겠지만, 또 곧 올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수억년 춘하추동을 통과한 경험이 없어질 순 없습니다. 죽은 듯이 보이는 그 순간에도 잠아는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힘들어도 견뎌야만 하는 경우라면, 견뎌야 합니다.
다시 줄인 글은 이런 말에 비해 너무 줄인 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 너무 말이 많아도 전달이 잘 안됩니다. 그래서 행간을 비워 놓는 다는 심정으로 짧게 썼습니다. 읽으시는 그대가 가려 읽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