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로드킬

박상화 0 509

 

 

일 끝내고 가는 늦은 밤, 비 몇가닥 돋다 그치다 한다. 차창은 흐리고, 가로등 없는 길이 짧고 어둡다 싶은데, 왼쪽 헤드라이트 앞으로 검은 물체가 날쌔게 뛰어 든다. 브레이크를 밟을 새도 없이 서로의 길이 교차되었다. 

 

오른쪽 바퀴에 덜컹하는 느낌이 없다. 토끼거나, 고양이거나 마르모토라는 큰 들쥐였을 것이다. 다행히 바퀴사이를 잘 빠져나갔기만 바란다. 전에 죽어있던 큰 쥐를 밟았을 때는 느낌이 있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을 보고 주춤하는 노루는 몇번 봤는데, 이번처럼 과감히 도로를 건너기 위해 뛰어든 경우는 처음이다. 차가 드문 밤길에 헤드라이트 불빛이 달려오는 속도와 자신이 도로를 건너는 속도간의 가늠이 잘 안되었을 것이다. 

 

짐승들에게 인간의 도로는 자신이 늘 다니는 길을 가로막는 절벽이거나, 담벼락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보호 수풀 하나 없는 민둥길, 거길 지나가는 것도 천적에게 들킬까 염려스러울텐데, 무시무시한 헤드라이트 불을 켜고 달겨드는 차들이 무시로 지나다니니 얼마나 두려운 길일까 싶다. 

 

안가면 되지. 안가면 산다. 하지만 동물들에겐 자기 구역이 있어서, 그 너머에 먹이가 있어서, 혹은 기다리는 새끼가 있는 집이 있어서 목숨을 걸고 건너가야만 한다. 주춤주춤 쭈볏거리며 가는 노루새끼가 있는가 하면, 준비-땅하고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토끼나 고양이도 있다. 마르모토는 늘 죽어있는 것만 봤지, 살아 달리는 걸 보지 못해서 어느쪽인지 모르겠다. 

 

입고 다니다 벗어 놓은 낡은 외투처럼, 길 복판에 깔린 불룩한 살과 뼈는 점점 납작해지고 점점 길가로 밀리다가 사라진다. 차와 동물이 서로 신호를 주고 받는 경우는 없다. 서로의 갈 길을 목숨 걸고 달릴 뿐이다. 

 

인간이 다니는 길도 저러할 것이다. 천진한 눈망울을 가진 사람들이 밥벌어 먹으러 다니는 길 가운데에도 저런 자본의 도로가 나 있다. 숨을 곳도 피할 곳도 없는 민둥 절벽같은 길, 아차 잘못 판단하고 달리다간 납작한 외투로 남는 길. 그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죽어가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교통사고 사망율은 암사망율보다 높다고 한다.

 

힘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교차할 때 마다 로드킬은 생긴다. 힘, 돈, 학력, 권력, 인맥, 또는 장애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교차에도, 자본가와 일반인 사이에서만 로드킬이 생기는 게 아니라, 모든 차이의 교차로마다 로드킬이 생긴다. 이 살벌한 불공평함이 스스로 그러한 자연인가.

 

도로교통법상 로드킬의 죄명은 '전방 부주의'뿐이다. 그렇게 죄가 드러나는 경우도 거의 없다. 사람 사이의 로드킬을 막고 안전을 보장해야 할 정부의 령은 '각자도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법치로는 딱지만 끊으면 할일을 다 한건가 묻고 싶다. 

 

누구나 로드킬의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인 시대, 이 수많은 교차로의 충돌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로드킬을 정리하는 것은 이익을 멈추게 하는 독재라는 주장도 있을 것이다. 멈추면 굶는다. 질끈감고 달리기만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면서도, 달리는 길을 멈출 수 없는 사람들을 본다. 멈출 것인가 달릴 것인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이유는 선택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불이익의 공포가 죽음의 공포보다 크다. 

 

모두가 도로를 점거해 버리면 달리던 차가 멈출수 밖에 없을 것인데, 착하게도 지침에 따라 각자도생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만 살겠다는 욕망이 나를 죽이는 유일한 길이 된다. 생사의 길은 바야흐로 운빨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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