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소 이야기

김영철 1 600

명절이라고 몇집 나눠 먹을라고 쇠고기 값을 알아보니 이제 한우는 우리같은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 되어있다 자그마치 한우 한마리 값이 천만원을 상회하고 한근 값이 칠 팔 구만원을 훗가 하고있다 정말 귀하신 한우가 되었다


어릴적 아부지는 소장수을 하였다  전문적인 장수가 아니라 가실농사 끝내고 소먹이가 많은 겨울철에 꼭 뿌라꾸(황소)만 사서 키워 오뉴월 되면 내다 팔곤했다 겨울에는 일도 없고 소는 상팔자다 외양간에서 날이 뜨시면 양지 바른곳에 푹신한 볏집에 누워 되삭임 하는것이 일이다  아부지는 소죽을 쓰는데 구정물에다 작두로 썰은 볏집 고구마줄기 죽재(쌀겨)가끔은 호박도 넣고 가마솥에 끓이다 몇번을 뒤집어 물러진 다음에 김이 모락하면 구시통에 넣어주면 소는 눈을 껌벅거리며 냄새를 맡으며 맛있게 먹는다, 황소는 암소와 골격부터가 다르고 성장 속도나 그 힘이 참으로 대단 하였다 암소는 쟁기질을 종일해도 논 댓마지기 갈기가 힘들었지만 황소는 늦게까지 하면 그 곱을 해도 지치지도 않았다
또 구루마에 볏집을 산 만큼 실어도 입에 거품도 없이 거뜬히 끌었다 그런데 이 황소는 키우고 길들이기는 암소에 비해 엄청 힘들었다 어른 아이을 알아 볼줄 알고 남인지도 정확히 알아 보아 한번 날뛰면 우리 아부지가 아니면 잡아 맬수가 없었다
한번은 우리동네 제일부자집 황소가 장광을 다 부셔버리고 날뛰어 붙잡아 맬수가 없어 아버지가 달래 매여주었다  암소는 고삐도 하나지만 황소는 고삐도 둘이고 그고삐는 삼으로 만들어 몇년을 써도 끄덕이 없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때 소한마리는 시골 빈농의 가정에선 전재산 이었다 동네 소있는집은 밥술이나 먹는집이고  가난한 집에서 내 소한마리 갖는것은 하늘에 별따기 처럼 어려웠다
그런데 없는 사람이 소를 갖을수 있는 방법이 24석 이라고 송아지을 데려다 이년을 키워주면 키워준 값으로 송아지 한마리을 주었다 24석을 줄때에는 저사람이 얼마나 부지런 성실한지을 꼼꼼히 살펴 보고 주고 24석이 지나도 살이 안붙어 있으면 데려 가지도 않고 더 키워주어야 했다
지금이야 온갖사료로 키우지만 그시절에는 사람도 소도 모두 영양 결핍 시절이었다 그야말로 꼴 한짐도 쉽게 밼수가 없었고 부지런하지 않고서는 소를 키울수가 없었다
24석으로 온 송아지들은 대부분 실하지도 못한 소들 이었다 아무리 먹여도 크지도 살도 안오르고 소주인은 오가며 바라보고 근데 한우는 병에 강하고 중소 정도만 자라면 주인을 알아보고 순응하며 주인을 닮아 간다 결국 짐승이지만 주인의 지극정성에 건장한 한우로 자라 내 금송아지을 얻어 오는날 처마밑에 안산에서 제일 좋은 스기나무 골라 매듭은 줄로 갈아 반들반들 코뚜레 만들어 놓고 삼나무 불여 잡털하나 없이 고삐 만들어놓고 아직 구시는 못만들었지만 곧 만들어야지
언제커 이 치장을 다해 신작로 너와 함께 걸어 볼꺼나
새벅별이 총총 하기만 하다

당시 벌교장은 전국에서 몇째 안가는 큰오일장이 섯다 지리적요충이라 멀리 부산 광주 여수에서 조차 짐 가득 실은 도라꾸하며 신작로에는 하양옷을 입은 장꾼들에 신작로는 허연 옥양목을 깔아 논듯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돈이 오가는 곳은 쌀전과 소전이다  벌교장 소전은 가시 철조망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그안에는 송아지부터 황소까지 수백마리 소들이 장관을 이루웠다 차가 없는 시절이라 멀리에서는 전날와서 말뚝을 차지하고 소맥일 도시락도 싸오고 늦게오는 사람들은 소 맬 말뚝이 없어 철조망에 매놓기도 했다 소전에는 거간꾼이 모든 거래을 흥정고 거래을 성사 시킨다 소이빨을 보고 나이을 알고 등애 자욱을 보고 쟁기질 하는가 못하는가를 알고 무릅관절을 보고 힘을 보고  두상과 전체적인 체형을 보며 값을 맥인다         순박한 촌로들은 후려치는 거간꾼 농간에 어짜지 못하고 국밥집에서 막걸리 한잔 하면서 고놈에 새끼 월사금에 비료값도 내야하고 마누래는 빙원도 한번 가봐야 하고 막걸리 한병이 비워질때 쯤이면 또 다른 거간꾼이 아래집 이영감과 함께와서 막거리 한병 더 시키면서 먼저 거간꾼보단 좀 더 준다 하고 이영감도 그만헌 값이면 괘안타고 거들어 고삐를 넘겨주고 나니 왜 이리 다리가 힘이 없을까  일도 잘하고 순둥이 였는디 존 쥔 만나 잘 살그라
어느새 서산에 해는지고 고삐쥔 손에 풋능금 한 봉다리가 소리도 없는 요비령이 되어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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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박상화
  그 시절 가난한 아버지들의 꿈이 아련합니다. 저 자라던 70년대만 해도 귀하디 귀해 간 소고기 밖에 구경할 수 없었지요. 그 귀한 소고기로 만들었다는 소고기라면이 그래서 충격이었고, 특별한 날 특식을 먹을 수 있다면 짜장면, 라면중에서 어떤 걸 고를까 하는 공상을 하며 놀던 어린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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