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폭우

박상화 0 445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었다. 스레트지붕을 두드리는 빗줄기는 굵고 거셌다. 비바람이 창을 뒤흔들어 방바닥을 뒹굴던 어린 우리들의 마음에도 걱정이 차올랐다. 밤이 늦도록 부모님은 돌아오지 않으셨다. 공장에 일 간 사촌 형님도 돌아 오지 않았다. 머리가 센 할머니는 무릎을 세우고 앉은 자세로 돌이 되신 듯 했다. 방안을 밝히던 알전구가 깜박깜박 죽었다 살아나고 살아나다 죽었다. 번개가 건넛산을 비추는 순간, 건넛산 중턱에 있던 친구의 집이 쪼개져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싸이렌이 울리고, 어느 순간에 부모님이 돌아와 할머니와 막내를 들춰 업고 빗속으로 산을 내려갔다. 늘 다니던 좁은 골목길에도 땅이 파이고 세찬 물길이 생겼다. 산을 내려오니, 도로는 이미 발목까지 차오른 물로 강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동생과 함께 아버지 등에 업힌 할머니만 따라 뛰었다. 첨벙첨벙 물소리, 호루라기 소리, 싸이렌 소리, 빗소리, 천둥소리가 얽혀서 제각각 흩어지는 사람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 천막이 쳐지고 교실이며 운동장이며 사람들이 가득찼다. 라면냄새와 아기똥 냄새 사이에서 담요 한장이 우리집이었다. 운동장에서 라면박스를 뜯어 라면 다섯개가 든 번들을 구호품으로 나눠주었다. 할머니는 종일 누워계셨고, 우리는 다만 귀하디 귀한 라면을 먹는게 즐겁고 신났다. 라면을 먹고 나면 어슬렁거리며 소문을 들었다. 뉘집 아버지가 무너진 집사이에서 어린애를 구하다 깔려 죽었다거나, 안양천 물살에 다리가 끊어지고 돼지와 냉장고가 종일 떠내려 온다는 얘기들이었다. 돼지를 건져오면 가난한 아버지가 얼마나 좋아하실 것인가! 의기투합한 코흘리개 밤송이 몇이 나뭇가지를 하나씩 들고 돼지를 건져오겠다 나섰다. 무너진 다리 밑에는 돼지대신 가마니가 줄을 서 있었다. 가마니마다 흙에 개어진 사람의 발이 나와 있었다.

 

그때도 사람들은 말이 많았다. 사람들은 말로 사는 것 같았다. 집이 부숴진 사람이 라면을 타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집이 부숴지지 않은 사람도 라면을 타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학교나 동사무소에서 라면을 나눠주었기 때문에 누구네 집이 부숴졌는지 안부숴졌는지 나눠주는 사람들은 몰랐다. 수재민 손들어! 그러면 손을 들었고, 손든 애들에겐 라면 몇번들이나 박스가 주어졌으나, 손을 든 애들중 반은 수재민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야, 너 들어!하면 들었다. 집이 부숴지지 않아 손을 들지 않았던 애들이나, 머리가 더 굵은 형들은 라면을 받아오는 걸 보면 부러움 반으로 질시를 했다. 집은 안부숴졌는데, 피난을 갔다가 온 우리집은 수재민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어린 나를 괴롭혔다. 아줌마들은 친구 k네 엄마가 팔자를 고칠 거라고 했다. k의 아빠가 폭우속에 무너집에서 어린애를 구하다 깔려 죽은 걸로 훈장을 받게 되었다는 소문이 돈 후였다. l의 아빠도 훈장을 받아야 하는데, 안됐다는 말도 했다. 부숴진 집이 토해 놓은 것 같은 흙더미에서 크레용이라도 주워오면 할머니는 크레용에 죽은애의 귀신이 씌였다고 내다 버리게 했다. 말이 별로 없던 조그만 여자애였다. 우리집은 산사태가 난 그 바로 위에 있었다. 마당에서 내려다보면 절벽이 생겨 있었다.

 

아버지는 줄담배를 피우며 옆집 s네 아저씨하고 머리를 맞댔다. 이사를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파트 5동 309호에 당첨이 되었다고 했다. 폭우가 오고는 즐거운 일의 연속이었다. 귀한 라면을 실컷 먹게 되질 않나, 학교도 안가고 매일 놀지를 않나, 이제는 말로만 듣던 아파트란델 새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다니! 꿈과 같은 나날들이었다. 친구가 몇 죽은건 눈물이 찔끔 나도록 슬펐지만, 나랑 친했던 애들은 다 살아 있어서 그렇게 슬프진 않았다. 그렇게 아버지와 옆집 아저씨와 사촌 형님은 곡괭이와 해머를 들고 멀쩡한 집을 부수기 시작했다. 멀쩡한 집을 자진 철거를 해야 아파트로 이사를 갈 수 있다고 했단다. 부엌벽을 두어쪽 헐고 지붕도 좀 부수고 나서야, 우리는 이사가는 트럭 짐 뒤에 몸을 끼웠다. 정들었던 마을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고, 언제 다시 돌아오나 하는 마음에 슬펐다. 단골 만화가게가 멀어졌고, 문방구와 약국이, 성당과 시장이 차례로 멀어 졌다.

 

나중에 알고보니 아파트를 공으로 준 것은 아니었다. 산동네 집값을 제대로 쳐주지도 않았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정부의 수재민 대책이란게 살던 집을 버리고 그냥 아파트를 새로 사서 이사간 거나 마찬가지 였다. 그 때문에 한동네 살던 사람들중 몇은 이사를 오고, 다른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가난한 산동네 사람들중에서 다시 가난이 갈렸다. 제일 가난하던 옆집 귀자네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딸부자네도 보이지 않았다. 산동네 사람들은 숱하게 죽고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뉴스는 정부가 새로운 아파트를 지어 불행한 수재민들에게 보금자리를 장만해준 것으로만 나왔다. 아파트 할부금을 낼 능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부의 수재민 이주정책은 또 다른 폭우였다.

 

1977년 안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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