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2006 여름, 조선남 시인과 건설일용노동자들을 기억하다/ 송경동

해방글터 0 1,021

2006 여름, 조선남 시인과 건설일용노동자들을 기억하다


송경동 『창』 편집위원, 시인

들어가며
며칠 전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거기엔 낯선 대구교도소 수인이 찍혀 있었다. 조선남(본명 조기현) 시인이었다. 그는 포항 건설노조가 포스코 본사를 점거하기 두어 달 전, 대구지역 건설일용노동자 2,000여 명과 함께 파업을 하고, 그 파업을 주동했다는 까닭으로 수배를 받다 구속되었다. 미안하던 차에 더 미안하게 편지까지 받았다. 외로운 창살 앞에 서서 둥근 달이나 보고 있을 그에게 무어라도 답을 해야 하지 않는가. 나는 편지를 쓰기로 했고, 그를 위한 문학인 탄원을 조직하기로 했다. 
아래의 글이 소박한 나의 답이다. 『창』은 만들어질 때부터 감옥에 있는 양심수 분들께 무료로 보내지고 있다. 아마도 그도 이 글을 볼 터이다. 그의 노동운동 관련 부분보다, 그의 시인됨을 주로 살펴 보았다. 탄원용으로까지 쓰여져야 하는 까닭이었다. 이해 바란다.
내일은 그의 동료이기도 했을 건설일용노동자 고 하중근 동지 추모대회가 포항에서 열린다. 대구 건설노동자들의 투쟁도, 포항 건설노동자들의 투쟁도 모두 사회적으로 외면당했다. 오히려 탄압받았다. 이것이 오늘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현주소다. 말로는 비정규직 차별근절, 사회양극화 해소를 외치지만, 정작 건설일용노동자들이 해방 이후 처음으로 스스로를 조직화하고 근로기준법에도 못 미치는 최소한의 요구를 하자, 뭉둥이부터 들이댄다. 그 과정에서 공권력 폭력으로 하중근 동지가 운명하기도 했지만, 목숨도 값이 다른지 왠지 사회가 조용하다. 
기가 산 것은 공권력뿐이다. 8월 4일 포항 집회에 참석해 추도시 낭송했다고 내게도 소환명령이 떨어졌다. 그 상상력이 기가 막히다. 작년, 여의도 공권력 폭력으로 돌아가신 농민 사망사건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대국민사과를 하고, 경찰청장과 서울경찰청장, 당시 기동단장이 물러나야 했다. 아무런 감각도 없는 정부와 공권력의 이 무디어진 머리를 깨부술 어떤 역사의 철퇴가 있을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본문으로
지난 6월 1일 대구경북지역 건설노동자들 파업 관련으로 구속수감 중인 조선남 지부장의 조속한 석방을 바란다.
구속수감 중인 조선남 지부장은 노동운동가이기도 하지만 오래전부터 시를 써온 시인이다. <민족문학작가회의>의 회원이기도 하다. 
그는 1989년 「아가야 어린이날에」라는 작품으로 <제1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고, 2000년에는 노나메기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동인시집으로 『땅 끝에서 부르는 해방노래』와 『다시 중심으로』를 펴냈고, 개인 시집으로 『희망수첩』(문예미학사 간행, 2000년)을 펴내기도 했다.
그는 우리 사회에 몇 없는 귀한 사람이기도 하다. 중졸의 학력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가난한 삶의 환경 속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해야 했고, 소년노동자로 삶을 살아내야 했다. 아마 1970년 청계천의 소년 ‘전태일’이 그러했을 것이다. 
그는 소년 전태일처럼 힘든 삶의 조건 속에서도 사람과 사회에 대한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 꿈과 희망의 내용은 지금 그의 주장대로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과도하게 자신의 노동의 결실을 착취당하는 이들이 존중받는 사회였다. 그 길의 결과, 일명 양심수로 불리는 감옥 생활을 몇 차례에 걸쳐 겪고 있기도 하다. 다만 그의 죄가 있다면, 자신처럼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살아온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손이 되고, 발이 되고, 입이 되고, 말이 되려 한 죄뿐이다. 
특히, 그는 일명 ‘노가다’로 불리며 사회적으로 가장 멸시받고 천대받아 온 일용노동자로 그 자신이 살며,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사회적 처우개선을 위해 일해 왔다. 시에 쓴 그의 삶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자판기에 동전 넣고 커피를 뽑는다
노동청에서 구직표를 쓰면서
경력: 용접공 14년
최종근무처: 비정규직
해직사유: 구조조정, 정리해고
쓰다말고 구겨서 쓰레기통에 집어던진다

수북히 쌓여 있는 1회용 종이컵처럼
구직표를 쓰고 있는 버려진 사람들
―「1회용 소모품처럼」 중에서


동무들이 책보 싸들고 학교갈 때
들에 새참을 해 날라야 했던
가난한 내 어머니의 어린 세월에서
손자재롱까지도 멀리하시며
뼈 마디마디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지금까지
안경공장 컨베이어에 매달려
안경테를 붙이는
(중략)
진통제로도 듣지 않는 허리통증을
침 몇 대 맞고 다시 공장에 가시는 어머니를 보면서도
공장 그만 다니시라고 못하는 징한 세월
―「죽어 마지막 소원이」 중에서


아는 바대로 건설현장에서 조선남 시인과 그들의 동료들은 일회용 소모품보다도 못한 처우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와야 했다. 건설현장은 지금 조선남 시인과 그의 동료들이 구속되어 있는 불법의 사유보다 수천 배는 많은 사측의 불법이 저질러지고 있는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였다. 전태일 열사 사후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그들은 지금도 가장 기본적인 법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다단계 하청구조의 맨 밑바닥에서 고질적인 임금착취와 체불, 4대 보험에서의 제외 등 각종 차별들을 수십 년 동안 감내하며 살아와야 했다. 현재 우리 사회의 화두인양 얘기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 그리고 사회양극화의 맨 밑바닥에 수십 년 전부터 ‘잊혀진’ 그들이 있었다. 
그래서 건설일용노동자들은 우스갯소리로 얘기하기도 한다. IMF사태가 고맙다고. 일명 ‘노가다’들은 IMF 이후 비정규직의 과도한 양산과 양극화의 심화 이후에야 비로소 ‘덩달아’ 사회적으로 관심받기 시작했다. 그것을 에둘러 표현한 말이다. 

조선남 시인,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그 삶의 밑바닥 속에서 일용공 비정규직들의 삶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함께해 왔다. 그의 실정법 위반이 결코 작지 않다 하더라도 생각하면, 그의 활동은 ‘탄압’과 ‘구속’의 대상이 아닌 ‘사회적 격려’와 ‘사회적 감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 사회가 건설일용노동자들에게 가해 온 수십 년 동안의 각종 불법행위와 차별행동들을 생각한다면, 금번 대구건설일용노조가 요구한 최소한의 요구들은 정당함을 넘어 우리 모두가 미안해 하고, 부끄러워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는, 정부는, 자본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왔는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들어섰다고 하지만 사회 민주화는 그들의 현실에서 보자면 아직도 너무도 먼 미래일 뿐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대사회적으로 자신들의 삶과 꿈을 알리고 소통하고자 노력했다. 그 방식이 ‘파업’이라는 형식이었을 뿐이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방식은 ‘파업’만이 유일한 수단이다. 그래서 법적으로도 노동자들의 파업은 적법한 것으로 보장되고 있다. 하지만 정부와 언론, 그리고 건설사들은 왜곡과 탄압으로 일관했다. 
좀더 나은 사회에 대한 꿈을 잃지 않은 것은 오히려 조선남 시인과 그의 동료들이었다. 그들이 꿈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눈물겨운 의미인지를 그는 시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더 이상 빼앗길 그 무엇이 남아 있어서가 아니다
해약한 보험이 남아 있거나
몇 달치의 퇴직금이 남아 있는 것도
버림받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자존심도 없다
그래도 우린 희망이다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무슨 법적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우린 희망이다

국민의 정부에 버림받은 국민으로
우리들에게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이랴
아무런 제도적인 보호도 없이
아무 때나 쫓아버릴 수 있는 임시직노동자
우리에게도 희망이 남아 있다
바로 당신이 희망이다

재계약에서 탈락하고
일용할 하루의 양식을 위해
두 마디 잘려나간 손가락에도 
10년 세월 손에 익은 용접기술 하나로
이 하루를 버리지 않고 하루 품 팔러나가는
당신만이 우리들의 희망이다
―「그래도 우린 희망이다」 중에서


이처럼 그는 현실운동가이기 전에 시인이었다. 아직 오지 않은 사회에 대한 꿈을 이야기하기에 시는 적격이었다. 시인의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오히려 더 치열하게 사회연대활동에 뛰어들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언론이나 정부, 사측이 이야기하듯 무슨 사회적 불순분자가 아니다. 불온세력이 아니다. 이념에 경도된 무슨 주의자도 아니다. 그들을 파업의 길로 이끈 것은 우리의 사회 현실이었다. 200만 건설일용노동자들의 삶이었다. 그 삶이 조금은 더 존중받고 행복해질 수 있다면 하는 바람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의 시에 나타난 사람들의 삶은 참혹하다. 들어 보자. 왜 들어 보지도 않고, 알려 하지도 않고 먼저 왜곡하는가.

객지 공사 떠돌면서
오랜 일 벗이 되어 온
김형의 손놀림
숨소리까지 맞출 수 있었던
그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공공근로마저 탈락하고
아내는 영영 소식도 없다고 한다
―「빈 손」 중에서

불을 밝혔다
마누라까지 공사장 데리고 나와
해장소주부터 큰잔으로 들이붓고
칼자루를 잡았다

미친 듯이 돈내기에 매달려
공사장에서 전기장판 한 장으로
작업복을 입은채 쓰러져 잠들고

질긴 목숨, 몇 번이나 끈을 놓고 싶어
아찔한 외벽타기 미다시 작업에
밥줄 메어보기도 했다

아! 이제는 정말 
뜨겁게 목줄 타고 흐르는 소주 한 잔 없으면
손이 떨리고 벽이 흔들린다
이러다 얼마나 더 버틸는지
질긴 목숨 얼마나 더 붙어 있을는지
―「미장공 서씨」 중에서

이 비 긋고 날 풀리면
다시 역전에라도 나가봐야겠다며
작업복을 챙겨넣는 선반공 김형
생명보험이라도 들어놓고
까마득한 비계파이프 위에서
손을 놓고 싶었다는 비계공 이씨
―「봄비」 중에서 


이처럼 구체적이고 아픈 현실이 그를 사회운동가, 노동운동가로 살게 했고, 시를 쓰게 했으며, 파업을 주동하도록 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그리고 함께 구속된 그들의 동료들은 처벌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전태일 열사는 30여 년 전 건설일용노동자로 1년 여를 살기도 했다. 그는 죽었지만 전태일은 따로 있지 않다. 그들이 오늘 우리 사회의 전태일이다. 나이를 많이 먹고, 멋져 보이지 않아서라고 말하면 안 된다. 그들이 오늘의 전태일 맞다. 단지 그들은 죽지 않고 나이를 많이 먹도록 살아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에 우리의 귀를 열어야겠다. 그들은 우리의 미안함을 받아야 하는 소중한 시민사회의 일꾼들이다.

차갑고 형해화된 법전의 문구가 아닌, 사회의 공공성과 차별받는 사람들의 삶의 존엄이 먼저 고려되는 진정한 법의 정신이 그들에게 구현되기를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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