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최고의 소주 안주

박상화 0 978

 

 

비가 온다 

주력부대는 먼 하늘을 먹먹하게 물들이며 오고 

본대는 휘몰아 치기도 하고, 숨을 고르기도 하면서 

몇 특공대 놈들은 유리창에 몸을 터트리고 주루룩 흐르는 걸로 

상륙작전을 한다 

몇 분만에 가슴 한쪽이 허물어 지고 

대책없이 함락당한다, 이제 곧 전화가 울릴 것이다 

술 사줄까, 살래? 

암튼 나보다 먼저 무너진 놈의 전화는 

비만 오면 거르는 법이 없었다 

 

그와 나는 굶기동기다 

어설픈 기왓장을 뚫는 데 성공한 빗방울들이 

기왓장 밑을 받치던 플라스틱 슬레트 판을 두들기는 소리는 

빈 광에 버려진 깨진 연탄같던 우리가 

배고파 누워서 늘 듣던 웅장한 확인음이었다 

배가 고파 어질어질한 몸을 주워다 

우리들 청춘의 쪼가리만한 툇마루에 나와 앉히고 나면 

빗줄기는 국숫다발처럼 서있고 세상은 떠내려 갈 것만 같았다 

한켠으로 튀는 빗방울을 느끼며 

오그려 앉은 캄캄한 낮시간들을 

우리는 자주 그렇게 보내곤 했었다 

소주나 막걸리 같은게 우리의 음침한 광을 찾아오려면 

아직도 꽤 저물어야만 하는 시간들 속에서 

 

비가 온다 

전화가 올 시간인데 안온다 

어쩌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은 족발을 사들고 가는 것이다 

배고픈 누군가 기다리는 광이라도 좋고 

우산을 쓰고 놀던 아들놈이 킹킹거리는 호롯한 집이라도 좋다 

소주 한 둬병 끼고 

파전을 부치자면 밀가루에 파에 김치에 오증어든 괴기든 넣고 기름두르고 

지글자글 부쳐내자니 손이 많이 갈 뿐만 아니라 

파전 몇장 부치는 이 따로, 입에다 버리는 이 따로 

따로따로 바쁘다. 이런 안주는 입이 많아서 각자 분업이 될 때나 

다소곳이 연애할 때나 해 먹는 안주다. 

비가 많이 오는 구려..그런 태산자락 바윗돌에 식용유 새는 멘트가 날으면, 

아무말 없이 김이 모락자락 나는 부침개를 한 장 척, 접시에 뒤집어 담아 주고 

빗소리를 바라보며 샥 웃어주는 그런 풍경을 연출할 때나 적절한 안주고, 

아자씨들은 그런게 구찮다 

오향장육이라는 족발을 아시는가 

한 다섯가지 맛나는 장을 진하게 배인 구릿빛 족발은 이미 조리가 쫑난 식품이다. 

근데, 이게 맛은 좋은데, 먹다보면 되다. 우리네는 또 먹다가 된 안주를 별로 안즐겨하지 않는가 

냄비에 알아서 물을 붓고, 김치를 썰어놓은 접시째 뒤집어서 쏟아붓고 

족발을 넣는다. 족발은 족발 파는 아줌니께서 냄비에 넣기 좋은 크기로 썰어주신다. 

그리고 그냥 끓이면서 소줏잔에 똘똘똘 한잔 따른다. 

족발과 김치를 넣은 물이 바글바글 끓으면 기호에 따라 간이나 한다. 

족발이 맛을 내기 때문에 일체의 요리 솜씨가 필요없다. 

끓기만 하면 수준급의 안주가 장만되는 거다 

 

사당동엘 가면 

버스가 착 서는 그 앞자리에 뿔건 포장마차가 하나 있는데 

그 안에서 족발도 팔지만, 가끔 말 잘하면 

'오향장육김치찌개'라는 긴 이름의 소주안주도 끓여준다 

비가 오기 때문에 

그 옆에서 모자파는 아저씨가 

포장의 계급장을 달지못하여 돌아갔을 쓸쓸한 그 길자욱을 기리면서 

아까 따라 놓은 맑고 찬 소주를 한잔 탁 털어넣고 

일회용 숟가락으로 한 국물 떠넣으면 

빗소리가 돌연 하늘을 뚫고 내리듯 크게 들리는 득청을 경험할 수 있다 

쏴아아 쓸고가는 게 어디 빗소리 뿐일까 싶은 

찬 소주 한잔의 안주를 

함께 마시고 싶은 놈의 전화는 내내 오질 않는다 

 

얼마전 

놈이 다니던 회사는 개값에 팔렸다고 하고 

동료 몇과 함께 하릴없이 길거리로 나왔다고 했다 

얼마전 

한달을 두고 갈데가 없더라고 

노가다도 일자리가 없더라고 

실업급여를 신청하러 나온 길에 소주한잔 할래 전화가 왔었다 

놈 답지 않게 

비가 한 방울도 안오던 날 

땀이나 눈물같은게 비처럼 내렸을 거 같던 날 

 

무장을 해제하고 한잔할 친구가 

배고픈 비의 드럼소릴 같이 듣던 친구가 

최고의 소주 안주라면 

두드렁 차드렁 두드리는 빗방울의 무게를 견딜 어깨가 쳐지고 아픈 오늘같은 날 

족발집에 들러야 하는데 

엊그제 다친 허리가 엉덩이를 뻐근하게 돌면서 다리가 쑤신다 

혼자 먹는 오향장육김치찌개는 맛이 없는데 

 

 

2003.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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