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유수지를 지나며

달의바다 0 387
유수지를 지나며


가뭄은 길었고 홍수는 오지 않았다
가뭄에도 수풀은 무성했고 물은 마르지 않았다

입을 벌리고 작은 새들이 파륵파륵 날아가기도 했다
전봇대만큼이나 키가 큰 나무들이 둑을 짓밟고 빽빽히 내리꽂혔다

그 길은 그늘진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처럼 캄캄하고 어두웠다
슬러지처럼 퍼진 노을을 자전거에 매단 노인이 느릿느릿 지나갔고
가끔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은 악취가 낀 코를 막고 기침을 하며 돌아갔다

공단 건너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유수지가 있는 줄도 몰랐다
일곱 살 어린 애가 납치되어 돌맹이를 매달고 살해당한 줄도 몰랐다

갈대숲 수평선 끝까지 철따라 꽃이 피고 새가 울었다
고깃배 드나들던 포구는 사라지고 소금창고 너머로 갈매기가 날았다

유수지는 검은 천으로 검은 관을 덮은 폐수저장소가 되었다
유적을 남기려고 오래 전부터 녹슨 배 한 척이 제방 끝에 닻을 내렸다

홍수는 오지 않았고 사람들은 여전히 가뭄을 저주했다
그럼에도 홍수가 지면 공단과 마을이 온통 잠길 거라며
관할 시청에서는 유수지 둑을 더 높게 쌓고 바닥을 더 깊게 파냈다

막바지 저주가 뜨겁던 여름이 가기 전에 드디어 유괴범이 잡혔다고 했다
평범한 사십대 가장이라는 범인이 경찰관들에게 붙들려 수갑을 차고 왔다
현장검증이 끝났을 때 유수지에는 폭우가 쏟아졌다

하루가 채 못 되어 둑방까지 차오른 물이 금방이라도 범람할 듯 넘실거렸다
아이를 대신해서 목이 졸린 인형이 물속으로 풍덩,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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