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포포아저씨

박흥렬 0 635

오전 내내 가느다란 봄비가 자를 대고 꼬박꼬박 그은 것처럼 왔다.

포포아저씨가 죽었다. 지난 주였다고 전했다. 암이었다.

말을 전하는 포포아줌마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오랜만에 술이 깬 성실아저씨가 좋은 사람이었다고 아는 말을 거들었다.

포포아줌마가 복권을 사가지고 간 뒤에 햇살이 비췄다. 

 

낡은 스캐너는 자주 깜빡 졸음에 빠졌다.

스캔이 안되서 기다리는 2초 3초간이 나는 무안하였다. 긴 기다림이었다. 

밥줄이 온전히 낡은 스캐너의 작동에 달려있었다.

 

살자고 하는 짓인데 어째서 끝은 항상 죽음으로 맺는가.

 

포포아저씨는 7년이 넘은 단골이었다.

낯선 이국의 땅에 뿌리를 얹어보려고 갓 도착한 우리는

처음보는 이국인들의 이름을 외울 수도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장사를 해야 살 수 있으니, 고객관리를 위해, 궁여지책으로 우리끼리 별명을 만들어 붙였다.

 

댄아저씨, 햄버거영감, 목소리장군, 아일트라이, 빠스야야, 헬로킴팍, 캔, 그람피영감, 심퉁이1,2,3, 바이킹아저씨, 알콜중독이발사, 헬로허니아줌마, 따거..

 

포포아저씨는 신사였다. 늘 넉넉한 웃음과 함께 손가락 네개를 펼쳐보이며 '포앤포'라고 했다. 담배 펄멀멘톨4갑과 펄멀블루4갑을 달라는 뜻이었고, 매일 맥주 30캔씩 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저씨는 공무원으로, 아줌마는 은행원으로 부부가 벌어 넉넉하고 , 저녁마다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며 환담하는 삶의 즐거움은 영원할 것 같았다. 작년까지 하루도 변하지 않았었다. 

 

작년 어느 날 암에 걸렸다 했다. 한동안 안 보였다.

다시 나타난 포포아저씨는 얼굴이 밀랍같았고, 

멋진 그레이였던 머리에는 모자를 눌러 썼고, 

몸은 반쪽이 되어있었다.

우물만큼 깊던 미소가 접시만큼 옅어져 있었다. 

 

미국의 병원비는 상상을 초월한다. 암치료하는데 십억원은 기본이다. 

평생을 성실히 살아온, 연봉 1억이 넘는, 중산층 노부부에게도

암선고는 파산선고와 같다. 실제로 그래서 파산하고 방한칸없이 쫒겨나는 노부부를 여러 번 봤다. 

 

부부가 평생을 번 돈은 암세포에게 다 빼앗겼을 것이다. 

돈도 마르고 목숨도 말라갔을 것이다. 

희망이란 어쩌면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내일에 기대는 것이니,

모든 희망은 불쑥하는 감정의 장난일 뿐이다. 절망도 또한 같다.

 

하지만 남편의 목숨을 걸고 하는 싸움에서 

포포아줌마가 결말을 미리 긋고 합리적인 선택만 할 수는 없었을 것을 안다.

남편은 결국 죽고 무일푼이 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이다.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포포아줌마는 남편도 돈도 다 잃었다.

하루 네갑이던 담배도 끊고, 일주일에 한번정도 복권만 산다.

포기했더라면, 아마 건진 재산을 다 술로 마셔버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포포아줌마는 슬프지만 평안해 보였다.

 

나도 내일까지 지불해야할 청구서에 마음을 뺏기고 있었다.

책을 펼쳐도 청구서로 보였고, 집요한 거머리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통증이 올 것이고, 피로가 몰려 올 것이고, 자야 할 것이다.

통증이나 피로가 오는 것은 

집요한 거머리에게서 나를 보호하려는 내 몸의 방어장치였다. 

그 장치가 없다면 산다는 건 그냥 바삭바삭 말라가다 죽는 일이었다. 

매일 내일까지 지불할 청구서가 새로이 왔다. 

우체부가 사신처럼 보였고, 은행원이나 전화로 오는 카드사 독촉원들도

나같이 매일 자기의 청구서를 걱정하는 사람들이었다. 누구나 첩첩산중이었다.

 

살자고 하는 짓인데 어째서 끝은 항상 죽음으로 맺는가.

 

포포아저씨가 죽었다. 암이었다.

포포아줌마는 '누구나 그러한 보통의 암'이었다고 말했다.

나의 거머리인 청구서도 보통의 암이라고 생각했다.

그 거머리가 나를 파먹는 과정이 삶인가. 

청구서를 클리어하기 위해 얼마나 애타게 하루를 뛰고 또 뛰는가.

종이쪼가리에 쫒기고 쫒기며 종이쪼가리를 보내놓고 웃는 사람들을 생각하였다.

 

암에 걸린 사람들은 나는 아닐거라고 믿고,

복권을 사며 바로 나일 거라고 믿는다. 

 

밤이 내렸다. 비는 어둠속에 숨어 보이지 않고 

물고인 곳에 수 많은 파문만이 비가 오는 것을 기록할 뿐이다. 

기록은 기록으로서 족하다.

누군가 파문을 보고 비를 알아차리면 된다.

이야기는 어수선하지만, 그 또한 심란하였음의 기록으로 족하려 한다.

 

 

2015.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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