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김 군

김영철 2 908

김 군

 

 

1

애초에 그 성은 김가 가 아니였다.

길거리 장사꾼들이 부려 먹기 위한 머슴 작위이다.

가로 판매대에서 (이하 박스) 담배, 음료 껌 등을 팔면서

나이가 오십이 넘었는데도 장가도 가지 못하고 팔순 노모를 봉양하며 산다

주변 거리의 장사꾼들은 사소한 전기부터 용접까지 일만 생기만 김군을 찾는다.

이웃들 일이 생기면 제 장사도 접어버리고 끝까지 고쳐 주면서 그 일당은 우유한병, 소주한병이면 허허, 고맙습니다 하는 김군,

홀어미 밑에서 공고를 졸업하고 군대에도 전투방위로 근무했다고 유난히 “전투”을 강조하며 돌아설 틈도 없는 박스 공간에서 소변깡통도 옆에 두고 산다.

냄새난다고 그리 말려도 소변보다 더 더러운 냄새는 사람들이라 하며 손사래를 친다.

유일한 취미는 성경 읽는 것이다. 교회도 가지 않으면서 성경만 줄기차게 읽고 또 읽는다 성경만 읽으면 다른 책은 볼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또 노랠 좋아한다. 시디가 몇 십장 있는데 그 전부가 심수봉 노래뿐이다, 노래도 이 노래만 들으면 다른 노래는 들을 필료가 없단다. 소주는 주식이 되어 한 병 정도는 한입에 마셔버리는 대단한 술꾼이다. 그러한 김 군을 이웃들은 일은 잘도 부려먹고 돌아서서는 더럽고 부족한 사람이라고 수근 거리면서 김군이 파는 일회용 커피는 절대 사먹지 않는다

 

2

김 군은 아버지가 있다고는 하지만 한 번도 본적도 없고 형수가 있다고 횡설수설이다

노모님은 아직도 박스에 나오면 막걸리 한 병 거뜬이 드시고 담배도 여전히 골초이시다. 김군은 어머님 좋아하는 음식이나 생필품은 돈을 아끼지 않으며 미리 다 사드린다.

노모님은 우리 아들처럼의 효자는 지금 세상에는 없다고 하면서 아들자랑도 대단했다. 어머님은 그 힘든 시절 과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그 인생 여정에는 쓰라린 과거가 배여 있는 여인인 듯 싶다.

30년전 청량리 역전앞에서 커피를 팔았다고 한다. 한잔에 백원씩 받고. 당시 청량리 근처에는 성매매 집단촌. 소위 588 이란 곳이 성업중이었다. 김군은 그곳에서 성매매여인들의 오빠가 되어 커피 몇 잔 외상주고 나면 그 젊고 예쁜 아가씨들에게 본능의 욕망을 해결 했다 하며 지금 어디 살고 있는지 그 시절이 늘 그립다한다.

청량리역이 계발되면서 서울시가 노점상 이주대책으로 운 좋게 박스에 당첨되어 이곳 사당동으로 정착한지가 20여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노모와 열심히 일한 덕에 작은 연립주택도 마련하여 살았지만 김군의 젊은 성욕구는 사당동 작은 여인숙으로 전전했다. 나이든 아줌씨와 짧은 시간에 즐기고 나면 3만원이고 돈이 아까운 김군은 절대 긴 잠은 자지도 않았다, 그러다 몇 해전 성매매금지법이 발효가 되어 여인숙에도 갈수도 없고 안마시술소나 은밀한 곳의 성매매는 김군의 형편으론 감당할 수가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좆 같은 세상 씹값만 올려났다고”.

김군에게 여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 여자와 10여년을 따로 살면서 서로 필요에 의해 만나 욕구을 채워가면서, 함께 살려고 마음도 먹었지만 늘 어머님께서 반대 하신다. 그 어머니에게는 김군은 자식이자 남편이자 의지 할 수 있는 유일한남자였고, 김군도 역전앞에서부터 시작된 살벌한 세상살이에 어머니는 곳, 아버지고 날 감싸 지켜주는 유일한여인이었던 것이다

 

3

가는 세월을 누가 비켜설 수 있던가!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릴듯한 가벼워진 노구를 이끌고 아들의 박스를 찾아 나서보는 어머니는 희미한 청량리역만 찾아 미로를 해매이다 동네사람들에 이끌려 온 어머니는 여기가 어디냐고?...

 

아들도 잘 알아보지 못하는 알콜성 치매에 걸렸지만 김군은 잠시 정신을 잃은 것이라고 작은 골방에 가두어버린다.

어느 날 탈출을 시도하던 어머니는 복합골절이 되어 모 대학병원에 입원시키고 병원비 마련을 위해 김군은 미련 없이 전 재산인 집을 헐값에 팔아 병간호에 최선을 다했다.

 

이즈음 한 여자가 김군의 주위를 맴돌며 접근하기 시작했다, 간병인을 써 어머니 병수발을 해야 했던 김군으로 써는 가끔 병원을 찾아 어머님을 돌봐주는 그 여인은 천사였지만 고시원에 기거하는 정체불명의 여인은 친절과 호의와 여자의 무기로 담배 파는 현금에 눈독을 들리며 김군을 유혹하여 급기야는 통장과 카드까지 관리하며 꽃뱀의 본색을 드러냈다.

이웃 들은 조금 부족한 김군이 저러다가 망한다고 꽃뱀여인을 경찰서에 성매매범,파렴치 갈취범으로 신고하여 경찰에 불려갔지만 김군은 내 어머니를 2년 동안 병수발 간호을 해준 고마운 여인이라고 탄원해 풀려나왔다.

어머님 병세는 갈수록 악화 되어 2년여만 다시 골방으로 모신 후, 며칠만에 아들 품에 안겨 어머니는 모자의 연을 다했다.

어머니 병수발에 작은 집 한 채 다 쏟아 붇고, 어머니 간병을 핑계 삼아 다가왔던 여인에게 아낌없이, 미련 없이 모든 돈을 주어버리고 이젠 남는 것은 피붙이 하나 없고 박스 하나뿐이다. 장례식장에도 그렇게 일을 부려먹고 온갖 걱정을 해주던 이웃들은 하나도 오질 않고 문상객 하나 없이 어머님과 김군은 이별의 잔을 나누며 세상사, 인심도 탓 하지 않고 울지도 않으면서 혼자, 혼자서 마지막 가는 어머님의 길을 지켰다.

 

이제 둘러보아도 아무도 날 지켜줄 사람이 없다. 흔적은 분명한데 어머님은 아니 계시고, 지금도 쫒아 오고 있는 청량리 깡패들의 갈취와 폭행이 이불속까지 파고든다. 

 

 4

 

1980년대 청량리역은 화려 했었다. 경춘선은 서울과 호반의 도시 춘천을 연결하는 철로로 북한강을 끼고 달리는 주변경관은 철도중 가장 아름다운 철길 이었고, 주말이면 대학생들의 MT객이 북적되고. 평일에는 강원도 사람들은 새벽열차에 농산물을 실고와 청량리시장에 팔아 생계를 유지해 가는 사람도 많았다.

유동 인구가 많은 곳, 또 돈이 날아다는 곳에는 반드시 노점상이 생겨나고 독버섯 같은 깡패들이 기생하는 그 시절이었다. 낮에는 휘황찬란했지만 밤에는 약육강식 밀림의 법칙이 존재하던 암흑 천지였다. 80년대 깡패들은 점 조직되어 관 하고도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가장 힘없는 사람들에게 군림하며 갈취를 일삼던 시절이었다.

노점상들은 고정으로 장사하는 자리를 하나 잡기까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주변 상가는 물론이고 단속반 깡패들에게 까지 모진수난의 세월을 이겨내야만 “생명의 자리”를 만들 수가 있다 . 그래서 노점상들은 자릴, “목숨”이라한다.

 

청량리역 앞에서 커피를 팔아 아들을 공부시키면서 김군의 어머니는 때론 억척으로 때론 업드려 빌면서 역전의 무법에 치를 떨어야 했다.

김군은 군대를 전역하고 몇 군데 직장생활도 해보았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마땅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새벽에는 어머니가, 밤에는 김군이 커피를 팔면서 그 험한 역전앞 생활이 시작되었다.

장사를 하기 전에는 잘 몰랐는데 어머니가 왜 그리 부들부들 떨고 헛소리를 하는지, 잠자다가 왜 그리 악을 쓰는지 장사를 해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릿세라는 명목으로 깡패들에게 하루매상 20%이상을 갈취해 당하면서 툭하면 여러가지 명목으로 또 갈취 펀치해 간다, 그들은 노점상들의 하루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고 가족관계및 경제적 정보도 실제적으로 파악 하고 있어 한번 그들의 먹이사슬에 걸리면 보호 해준다는 명목하에 빠져 나갈 길이 없다 역전앞 노점상들은 한마디로 깡패들의 노예였던 것이다

 

5

당시 청량리 역전앞 김군은 젊은 청년이었지만 약간 어눌하고 셈이 빠르지 못한 어리숙함에 그야말로 깡패들의 먹잇감이자 잔심부름 꾼 이 되었다. 588 매춘도 그들이 처음 들여보내 주어 그 맛을 알게 되었고....

천생이 착한 김군은 어느 날 부터 강패들의 집단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등쳐 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처절한 보복뿐이었다. 휘경동 다리 밑으로 끌려간 김군은 몇 명의 깡패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해 정신을 잃어버렸는데 간신히 찾아온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시켜 살려냈었다.

한동안 청량리역에 나가지 않았지만 깡패들은 병원, 집까지 찾아와 자리를 파버린다 협박하니 또 다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협박과 공갈. 폭력과 갈취에 세상이 버겁고 무서워지는 김군은 아수라장 세상구석에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성경을마주하면 공포감도 사라지고 깡패들이 좀 봐 줄거라 생각했지만 악의 세상. 악의 소굴에서는 한줄기 빛은 어디에도 없고 ,읽고 또 읽어도 깡패들 앞에서는 무용지물 이었고 공포감은 점점 확대 되어 등골에 식은땀이 나는 세월이었지만 먹고 살아야 할 밥 그릇 앞에서는 어쩔수가 없는 빈자들의 서러움 이었다.

 

그 즈음부터 김군은 악몽에 시달려야 했고 필연으로 술에 취해 살게 된다. 술 취하면 기분이 왠지 좋아지고 깡패들의 두려움도 조금은 가벼워진다. 취하여 노랠 들으면 위로도 되고 간들어 지는 심수봉의 콧노래도 순전히 공포심을 이겨 내기 위한 수단 이었던 것이다

성경과 종교, 노래와 문화가 과연 가난한 빈자들에 얼마만큼의 위로를 줄 수 있을까?

청량리 역전앞에서 성경을 읽고 심수봉 노래를 탐닉하던 리얼의 김군 아름답다 해야 할지. 추하고 못난 사람이라 해야 할지, 80년대 개발독재 아래 신음하며 살아왔던 무기력한 도시빈민들의 삶이었다.

 

 

 6

김군 어머니는 70년대부터 청양리역 앞에서 노점을 시작하였고, 김군은 아마 85년경부터 어머니을 따라 청량리 노점상이 되었다. 그러다 청량리 맘모스빌딩 화재로 인하여 청량리역이 개발되면서 운좋게 서울시에서 만들어준 가판대에 당첨되어 90년도 초에 사당동으로 가로판매점 생활을 새로이 시작되었다,

 

당시 80년대 도시빈민들의 정책을 보면 지금보다 오히려 좀 더 나았다. 노점상들을 최초로 합법화해서 서울시에서 몇 백군데 가판대를 만들어 청량리역 노점상들을 이주시켰던 것이다. 또 재개발이 되면 세입자들의 가 수용단지도 만들어 신축 동안 살게 하였고 최소한의 임대주택도 분양해 주었다.

2000년이후 정부에서는 철거민이나 길거리노점상은 불법이라면서 무조건적인 강제 철거만이 법이다. 영구임대 주택도 없고. 전국 백만이 넘는 이동장사꾼은 모두 쓸어버려야할 도시 쓰레기로 정도로만 생각하고 정책을 입안하고 있는 것이다. 당사자들의 동의와 참여가 없는 정책이 과연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둘 수 있을 것인지 참으로 답답한 도시빈민들의 질곡이다.

용산 참사나, 제반우리사회의 비정규직, 정리해고도 다 깊게 들여다보면 자본주의의 생태적 필연이고 결국 자본증식의 착취의 한 방편 인 것이다. 87년이후 노점상들도 총궐기하여 88년 올림픽 대단속에 대정부 투쟁에 깃발을 내걸고 피나는 투쟁을 시작 하였다. 명동성당에서 15일간의 백골단과의 대투쟁을 통해서 우린 단련되었고 싸워야 쟁취 할 수 있다는 교훈을 배웠다, 결국 정부에서는 올림픽을 빙자한 대단속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80년대 사당동은 산동네였다, 지금은 아파트가 많이 들어섰지만 당시에는 가마니골 이라고 무허가 판자집이 무수히 난립되어 있는 도시빈민들의 대표적인 달동네 이었다.

저녁이면 대로변에서 서부활극이 펼쳐지고, 주먹이 법보다 앞서고 가난한 판자집 아이들의

집단적인 폭행이 길거리에 난무한 시절이었다,

길거리 난전에서의 삶은 참으로 엄혹하기만 한다. 양육강식의 밀림의 법칙에 의하여 물고 뜯기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청량리에서 사당동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김군은 이곳 에서도 갈취와 폭력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2008년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김군은 결국파산을 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20만원짜리 단칸 월셋방에 밀린 담배값이 전재산 이었다 주위에 모두 말류하던 박스도 구청에 반납해버리고 그야말로 노숙인이 될 처지였지만 김군은 천하태평이다, 박스를 왜그리 구청에 무일푼으로 반납했냐 하면. 그곳에 앉아있으면 어머니 환영이 아른거려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하기사 제반 모든 문제와 여자 문제까지 어머니 지시와 결제로만 살아온 김군의 생활에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아무런 미련도 없고 나도 곳 어머니 따라 갈 것 이라며 내가 살아야할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점점더 깊은 공황장애  수렁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동네사람들의 권유와 추천으로 김군은 근처 백화점 청소부로 일하게 되었다. 한달 월급 85만원에 방세내고 술 담배값에 입에 풀칠이나 할 급여였지만 기계를 잘 만지는 김군은 금방 백화점 일꾼이 되어 어느 정도 적응되어 갔지만 마음 한구석에의 외로움과 상습적인 엄청난 주량에 그 몸과 마음은 점점 황폐 해져만 갔다.

꿈속에서는 늘 어머님이 손짓하고, 청량리 깡패들은 사당동까지 추적하여 돈을 뜯어가면서 다달이 상납을 강요하고, 미성년에게 담배 팔았다고 경찰은 추적해오고, 어쩌다 만나는 여자들을 한결같이 돈만 뜯어가고, 돈 안주면 만나주지도 않고. 세상의 모든 압제와 착취에 연약한 김군은 잠자리에서도 악몽에 시달려만 했다.

 

어머니 2주기가 다가오는 초 가을날 집에 들어가 문 열면 분명 어머님이 기다리는데, 어머니가 어디 가셨을까? 어디로 가신걸까? 이미 취해버린 김군의 환청은 어머님을 찾아 나선다. 늘 골목길에 기다리신 곳에 가보아도, 슈퍼에 가보아도 희미한 어머니 그림자만 보일뿐 점점 더 멀어져만 간다, 가을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어느새 소주 몇 병과 새우깡 한봉지 사들고 어머니 찾다보니 근처 아파트 벤치에 어머니가 비를 맞고 계신다.

“ 아들아 가자. 가잔 말이다” “ 어머니 술한잔 드세요” 잔도 없이 김군은 병째로 마신다.벌컥 벌컥 서러움과 분노와 외로움까지 섞어,

술을 마시는 건지 빗물을 마시는 건지 어머니와 마주한 술잔이 얼마만인가?

“어머니 마지막 잔만 들고 함께 가요” 어머니는 자꾸만 가물가물 흐릿해지고 눈을 뜨려 해도 눈이 감긴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어머니품속으로 자꾸만 빨려, 빨려 들어만 간다.

 

다음날 김군은 행려시신이 되어 대학병원으로 운구 되었다

 

 

김군이 박스를 정리 하면서 연장통을 내게 물려주었다.

“ 이제 형님이 동네분들 고장 나면 고쳐주세요”

분유 깡통이 들어있는 도라이버, 뺀지. 니빠, 테스타기, 기타등등 거의 20년 이상 김군의 땀이 배어있는 연장 들이다.

그러하다 보니 한 달에 몇 번은 연장을 통해서 김군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

평생을 폭력과 갈취에 시달리다 결국 그 운명을 다한 김군, 그것이 사회적 타살인지. 빈자들의 운명인지, 내 머리가 혼란스럽다. 이놈의 연장을 마주 할 때마다 ......

김군이 장사하던 박스는 철거되었고 오늘도 그 자릴 지키는 하얀 대리석 보도블록은

도시의 조명아래 휘황찬란하기만 하고.  근처 화장품 점포에서는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김군이 평생 애창 하던 노래가 울려퍼진다.

 

비가오면 생각나는 그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사람

사랑의 괴로움을 몰래감추고

떠난사람 못잊어서 울던그사람

그어느날 차안에서 내게 물었지

세상에서 제일 슬픈것이 뭐냐고\

(여느해 요절한  우리시대 비극을 함께 하면서 주절히 추모 해본 글이다)

......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밴드로 보내기

Comments

박상화
잘 정리하셔서 노점상/빈민의 애환을 그린 단편소설로 탈고하시면 좋겠네요.
김영철
탈고도 못했고 중북도 많아 언제 다시 정리해 보것네
카테고리
반응형 구글광고 등
최근통계
  • 현재 접속자 2 명
  • 오늘 방문자 170 명
  • 어제 방문자 609 명
  • 최대 방문자 2,936 명
  • 전체 방문자 466,162 명
  • 전체 회원수 15 명
  • 전체 게시물 15,811 개
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네이버밴드에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