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벌교 홍교다리

김영철 1 1,824

홍교다리

 

 

벌교는 다리가 많은 고장이다. 벌교천을 가로지르는 읍네에 다리가 8개나 되고 그 다리중 가장 오래된 교량으로써 아치형 돌다리가 홍교다리이다. 강물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그 옛날 뗏목다리가 다리의 효시이고 문헌에는 서기 1728(영조4년)에 선암사의 초안선사의 보시로 홍교다리가 건립 되었다고 한다. 홍교는 형태도 아름답지만 구조도 튼튼했고 그 어떤 명교(名橋)와 견주어 보아도 나무랄데가 없는 명교의 품위를 간직한 다리이다. 지금은 다리 난간이 없어졌지만 1960 년대에는 아치형 다리 위에 무지개형 난간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아름다운 다리였다.( 보물 304호)

 

원래 다리가 있는 곳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삶의 애환이 깃들어 있다. 내가 태어난 곳이 홍교부근 마을이기에 어릴 적 나의 하루는 홍교다리에서 시작되었고 또한 그 하루를 마감했다. 홍교다리는 유년의 나에게 자람의 요람이자 꿈을 잉태시킨 고향의 뿌리이기도 하다

 

내 나이 여섯 살 적에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엄니는 살 가망이 없다는 날 안고 백일도 않돼 젖을 끊어 저렇게 되었다고 통곡을 하시며 한탄하셨다. 안타까이 바라보시던 외삼촌께서 나를 안고 읍내 관산의원으로 데리고 갔다. 해골처럼 바짝 마른 애기에게 어떻게 주사를 놓을 수 있느냐고 엄니는 바라보지도 못하고 외삼촌 품에 안겨 주사 맞은 기억이 아스라하다

누비보대기에 날 업고 다리를 건너시던 엄니는 휭계다리 신에게 간곡히 내가 낫기를 빌고 또 빌었다.

“우짜든지 우리아들만 살려주씨요. 휭계다리 신님에게 빌고 또 비나이다.”

다리 중간에서 낙안 쪽을 바라보시며 엄니는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리며 치성을 드렸다.

비몽사몽간에 등에 업혀서 들은 엄니의 진한 모정이 내 生의 첫기억으로 지금도 생생하다. 엄니의 지극한 정성 덕분이었는지, 정말 휭계다리 신의 보살핌 있었는지 날려버릴 자식이 살아났다고 모두들 기뻐했다.

 

1960년대 어느 해 가을 홍교다리에서는 다리굿이 펼쳐졌다. 보릿고개 힘든 그 시절이었지만 십시일반 벌교유지들이 막걸리며 먹을거리를 준비하여 읍내에서 가장 장수하신 어르신께서 제주가 되어 바람에 휘날리던 그 도포자락, 수염하며 지금까지도 한 편의 영화처럼 아른거린다. 그야말로 다리가 무너질 만큼 많은 벌교사람들이 조상에게 감사드리며 자손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벌교의 발전을 소망했다 그땐 벌교 읍민 몇 만이 모여 모두가 축제의 신명에 북치고 장구치며 보릿고개 그 고단했던 삶의 시름들을 그날 하루만이라도 훌훌 털어버리며 어깨동무하고 벌교 기운들이 하나로 뭉쳐지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시절 홍교다리는 봉림 쪽으로는 통나무 다리였다. 큰물이 날 때마다 읍내에서는 다리가 떠내려 갈까봐 모두들 걱정하였다. 학교에서도 소화다리로 건너가라고 하였지만 시뻘건 황톳물이 금방이라도 다리를 삼켜버릴 것만 같은 철없는 물구경이 그렇게 재미있었다. 큰 물난리가 나면 초가지붕에 개가 타고 둥둥 떠내려 왔고 돼지가 수영을 그렇게 잘하는지도 그때 알았다. 지금은 다리 아래 갈대숲이 우거져있지만 그 시절에는 은빛 모래 백사장은 우리들의 놀이터이자 꿈을 키워가는 요람이었다, 일요일이면 다리 밑 백사장에서 씨름도 하고 닭쌈도 하면, 난간에서 구경하던 동네 어르신들은 “ 앗따 저놈이 누 집 아들이다요? 크면 한자리 할 놈이요” 치사도 듣고 친구들과 함께 호연지기를 기르던 곳 이었다.

 

얼마 전 홍교다리에 서 보니 감회가 새롭다, 날 업고 다니시며 휭계다리 토속적 신에게 간구하시던 우리 어머님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고, 명절이면 다리 난간에서 객지살이 자식들을 기다리시던 모정도 아련하다. 함께 자라며 싸우고 뛰놀던 동무들은 지금은 어찌 살고들 있을까? 홍교다리 앞 부용산은 저리도 푸르고, 밀려왔다 밀려가는 남해바닷물처럼 가버린 세월 속에 그리운 사람들아! 홍교다리에서 벌교를 추모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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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박상화
벌교라는 지명이 뗏목다리를 한자로 쓴 것에서 유래했다고 하니, 그 자리에 놓여진 홍교는 마을의 상징이네요. 가까이 안양 관악역 앞에 가면 만안교라고 정조가 놓은 홍예교가 있습니다. 벌교 홍교보다는 작겠지만,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참배하러 가는 길을 위해 만든 다리라 하여 사뭇 숙엄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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