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죽을 때까지 서서 견뎌야지

박상화 0 729

죽을 때까지 서서 견뎌야지

철근을 세우다가 철근에게 속삭인다
하루 철근 메고 났더니 어깨가 내려 앉은 모양이야
너무 아프고 무거워서 내려놓고 싶어
철근은 말이 없다 안다
얼마나 단단해져야 말을 잃고
온 몸으로 부딪혀 말끔하게 울음을 우는지
나는 아직 멀었다.

- 김해화 : 나는 아직 멀었다 -

정다운 페친께서 시 한수를 보여주셨다. 사기막골 시절에 풀솜할머니는 찬장 종지에 은전을 넣어 두고, 필요하면 나만 꺼내서 쓰라고 속삭이셨는데, 조로록조로록 몰켜다닌 조무래기 사촌들 앞에서 그건 엄청난 권력이었다. 화수분의 두근두근한 권력질에 맛을 들여 부엌을 들락날락하던 그 때처럼, 두근두근 마음이 계속 이 시의 첫 줄에서 맴돌았다. 권력질의 끝은 "드럽고 치사해서 안 먹어!"를 선언한 사촌누이의 단호함이었고, 부끄러워서 그만둔 뒤로 찬장의 그 은전종지는 풀솜할머니의 미소와 함께 아직까지 고이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부박한 삶의 찬장종지엔 "죽을 때까지 서서 견뎌야지"라는 은전이 계속 차올랐고, 어떤 단호함이 이것을 끝낼 수 있을지 몰라 나는 뱅뱅 맴만 돌고 있던 차였다.

맹한 것은 맹한 것을 낳는다. 너무 엉켜 복잡할 때는 몸을 쓰는 게 답이다. 가게 앞 주차장에 눈이 염병 십센치이상 쌓였으므로, 눈삽을 들고 나갔다. 겉은 두툼한 눈이었으나, 밀어보니 바닥은 녹아 물이었다. 거봐, 너네 너무 늦었다고 했어 안했어? 대지는 이미 봄기운을 품고 있었으므로 하루 반나절을 펑펑 쏟아진 두터운 눈은 더이상 위협이 되지 못했다. 성실한 편이 아니라서, 여기저기 낮은 데를 골라 물꼬를 내 주는 것으로 노동을 끝냈다. 물꼬를 따라 졸졸 흐르는 물이 예뻤다.

지극한 잔머리에 감읍한 하늘은 눈을 비로 바꿔 주었다. 하루반을 퍼부은 보람도 없이 두어시간만에 눈은 흔적만 남기고 대지로 돌아갔다. 노동의 결과는 기대이상이었다. 죽을 때까지 서서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감정의 간사함이 견디게 하는 힘이로구나. 좋았다.

그사이 뻗어버린 주유기를 뜯어 고치고, 성경책만큼이나 간절하게 복권을 들여다보고 긁고 다시 들여다보는 손님을 보냈다. 이맛살을 접은 채 한시간을 긁고 다시 긁더니 결국 본전을 찾아가면서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 탱자탱자 노는 꼴을 못보는 로또머신이 먹통이 됐고, 서비스 테크니션을 불렀다. 가게 안팎의 기계들이 일으키는 문제에 대해선 부처님 손바닥을 가졌으나, 바빠야할 시간에 이렇게 적막하게 앉아 있어야 하는 건 자격미달이다. 안다. 들어엎었어야 할 때, 들어엎지 못한자는 구백년동안 고통을 받으면서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을. 시방 벌받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나에게 '네가 눈을 밀어 바닥이 보이는 만큼은 너의 평화로운 땅으로 주마'라고 제의하시면, 얼만큼의 눈을 밀어야 이 땅에 평화가 오겠는가. 천평만 써레질을 하라고 해도 나는 평화를 포기하는 쪽의 인간일 것이다.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된다.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공상을 하다가, 아프시다는 철근시인의 친구시인 생각을 한다. 선 철근이 드러나고 녹슬면 건물은 끝이고, 그럼 폐허다. 철근이 견뎌주는 힘으로 나라가 서 있는 것이지, 세치 혀로 나라가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철근을 위로해 주지 않고, 철근에게 의전이나 받아 먹으려고 하는 그지같은 나라는 폐허다. 그건 분명한데, 봄도 분명한데, 나만 티미한 자세로 엉거주춤 한 것 같아서 이 봄도 나는 아릴것 같다. 대지가 눈물을 받아 먹었으니, 눈물의 값을 할 것만 목을 빼고 기다리면서. 에이, 참..

아프신 시인의 쾌유를 바라며, 나도 구백년만에 처음 시 한편을 필사해 본다. 시가 귀하다.

<땅으로 기라고>

- 김용만

하나 둘 강가에서 주워 온
바위들 바라보며
어머니는 오래 오래
바위에 치어 지내셨나 보다

올 봄
삼십 만원 주고
다시 바위들 강가에 내다버리고
마음이 얼마나 가벼운지
버림으로 얻는 홀가분함
강물소리 바로 들었단다
어머님은 
바위 치우시고
마당을 다듬어
군데 군데 잔디를 심으셨다
저 마당 가득
잔디 파랗게 깔아 놓고
나 이제 죽을란다
저기 작은 돌멩이가 무엇인지 아느냐
아침에 치우려다 잊고 있었는데
아니다
잔디가 뿌리를 뻗으며
자꾸 고개를 치켜들어
내 저 돌멩이로 눌러 놓았다

땅으로 기라고
기웃거리지 말고
땅으로 기라고

<출전 : 아직은 저항의 나이/일과시 동인 제7집/삶이 보이는 창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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