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조선남 시인을 위한 축전

조성웅 1 7,298

<시> 그대에게 가는 일의 순서
-조선남 동지에게

 

그대에게 가는 길은
벌써 몇 시간 째 정체되고 있다
이 지루하고 무미건조한 시간을 견뎌야하는 정체가
그대에게 가는 일의 순서일까
느릿한 풍경들이 정지되고
나는 차분하게 봄 풍경 속으로 들어 간다
자주빛의 복숭아 꽃, 노란 개나리, 초록의 새싹들 연두빛의 봄 하늘, 흰 구름
내가 미처 마음 주지 않은 곳에서 무엇인가 자꾸 자꾸 일어서려는 것들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내부를 환하게 채우는 일,
그대에게 가는 일의 순서
이 정체 속에서도
표나지 않게 숨통을 탁, 트이게 하는
자기 빛깔로 한 계절을 나는 것들
자기 빛깔로 최선인 삶이
어우러져 내 안으로 들어온다
이 정체 속에서도
나를 환하게 환하게 다 채우고서야 그대에게 가는 길
길 밖의 풍경, 풍경 속의 길
이 색감과 향기와 일어서려는 기운들을
다 안아 가고 싶다
그대 삶에 심어주고 싶다

 

대구에 조선남 시인을 만나러 가면서 메모하고 완성해서 두 번째 시집에 수록한 시다. 내 시집을 비평했던 평론가들이 두 번째 시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 중의 하나로 칭찬해줬던 시다. 내가 선남형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름답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 이 마음 그대로 29일 조선남 시인 출판기념회에 갈 것이다.

 

해방글터 동인들은 아직도 날 '현문아', '현문이형'이라고 부르곤 한다. 내가 해방글터 동인들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이름이 '조현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난 비합법 활동을 하고 있었다. 여러 가명을 사용했다. 정치조직 기관지에 정치 선전글을 기고했던 이름이 다르고 또한 시를 발표할 때의 이름이 달랐다. 하지만 난 내 첫 번째 시집을 낼 때 필명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본명으로 첫 시집을 내고 싶었다. 그러나 조직은 보안상의 이유를 들어 본명으로 내는 것에 반대했고 또한 시집 문장 중에 '혁명적 사회주의자'란 단어도 '현장활동가' 혹은 '선진노동자'로 바꿔야 했다.

 

그만큼 비합 활동 시기는 내겐 문학의 황무지였다. 몇 번이나 시를 포기하려 했었던가? 어느날 문득 머리 속에서 시의 문장들이 스쳐 갈 때마다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그 떨리는 감정을 억눌러야 했는지. ...수많은 내부 논쟁 자료들, 원전과 다른 정치조직들의 이론글, 정치선동들을 읽고 또 쓰고 프린터하고 동지들을 만나 배포하고 토론을 조직하고 입장을 취하고 행동을 조직하는 빡빡한 일정들 속에서 도대체 시가 어떻게 내게 왔는지.

 

난 어느 순간 문건제조기가 되어 있었다. 그 딱딱한 기계적인 시간 속에서도 아주 짤나의 순간에 동지의 표정이, 그 몸짓이, 그 웃음이, 그 행동이 내 가슴에 훅 들어 올 때가 있다. 이 때가 시가 드는 순간이었다 내게 시는 동지들에게 몰래 쓰는 연애편지이기도 했다. 난 회합이 끝나고 수줍게 프린트 한 내 시를 선물하곤 했다.

 

2000년 겨울, 울산으로 내려오면서 지난 한 시기를 정리하고 싶었다. 2001년 여름에 내 첫 시집이 갈무리에서 나올 무렵, 난 박상화 시인이 만든 '전국현장노동자글쓰기모임 해방글터' 홈페이지를 우연찮게 알게 됐다.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로 일하면서 쓴 현장시들을 게시판에 올리기 시작했다.

조선남 시인은 각별하게 내 시를 돌봐줬다. 내 시를 이토록 정성스럽게 봐 주는 사람도 있구나 싶어 참 고맙고 놀라웠다. 어느날 조선남 시인은 날 조직하기 위해 내 곁으로 왔고 함께 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세상에 날 시인으로 인정해주는 사람도 있구나. 난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날 시인으로 인정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었다.

 

조선남 시인은 해방글터가 '마음의 고향'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내게도 해방글터는 시인으로서의 내 고향이기도 하다.

 

내게 시인으로서의 긍지를 갖게 해 준 조선남 시인이 두 번째 시집을 냈다. 내겐 참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이다
그가 오는 29일 대구에서 출판기념회를 연다.
밝고 환한 기운으로 나를 가득 채우고 그에게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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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김영철
조시인 그래도 어디 보다 글터 본령을 지켜야지 
소소함과 사소함이 그리워 진다네

익어 떨어지고  문들어지더라도
바라보는 그곳에
늘 함께 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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