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홍교다리
벌교는 다리가 많은 고장이다. 벌교천을 가로지르는 읍네에 다리가 8개나 되고 그 다리중 가장 오래된 교량으로써 아치형 돌다리가 홍교다리이다. 강물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그 옛날 뗏목다리가 다리의 효시이고 문헌에는 서기 1728(영조4년)에 선암사의 초안선사의 보시로 홍교다리가 건립 되었다고 한다. 홍교는 형태도 아름답지만 구조도 튼튼했고 그 어떤 명교(名橋)와 견주어 보아도 나무랄데가 없는 명교의 품위를 간직한 다리이다. 지금은 다리 난간이 없어졌지만 1960 년대에는 아치형 다리 위에 무지개형 난간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아름다운 다리였다.( 보물 304호)
원래 다리가 있는 곳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삶의 애환이 깃들어 있다. 내가 태어난 곳이 홍교부근 마을이기에 어릴 적 나의 하루는 홍교다리에서 시작되었고 또한 그 하루를 마감했다. 홍교다리는 유년의 나에게 자람의 요람이자 꿈을 잉태시킨 고향의 뿌리이기도 하다
내 나이 여섯 살 적에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엄니는 살 가망이 없다는 날 안고 백일도 않돼 젖을 끊어 저렇게 되었다고 통곡을 하시며 한탄하셨다. 안타까이 바라보시던 외삼촌께서 나를 안고 읍내 관산의원으로 데리고 갔다. 해골처럼 바짝 마른 애기에게 어떻게 주사를 놓을 수 있느냐고 엄니는 바라보지도 못하고 외삼촌 품에 안겨 주사 맞은 기억이 아스라하다
누비보대기에 날 업고 다리를 건너시던 엄니는 휭계다리 신에게 간곡히 내가 낫기를 빌고 또 빌었다.
“우짜든지 우리아들만 살려주씨요. 휭계다리 신님에게 빌고 또 비나이다.”
다리 중간에서 낙안 쪽을 바라보시며 엄니는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리며 치성을 드렸다.
비몽사몽간에 등에 업혀서 들은 엄니의 진한 모정이 내 生의 첫기억으로 지금도 생생하다. 엄니의 지극한 정성 덕분이었는지, 정말 휭계다리 신의 보살핌 있었는지 날려버릴 자식이 살아났다고 모두들 기뻐했다.
1960년대 어느 해 가을 홍교다리에서는 다리굿이 펼쳐졌다. 보릿고개 힘든 그 시절이었지만 십시일반 벌교유지들이 막걸리며 먹을거리를 준비하여 읍내에서 가장 장수하신 어르신께서 제주가 되어 바람에 휘날리던 그 도포자락, 수염하며 지금까지도 한 편의 영화처럼 아른거린다. 그야말로 다리가 무너질 만큼 많은 벌교사람들이 조상에게 감사드리며 자손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벌교의 발전을 소망했다 그땐 벌교 읍민 몇 만이 모여 모두가 축제의 신명에 북치고 장구치며 보릿고개 그 고단했던 삶의 시름들을 그날 하루만이라도 훌훌 털어버리며 어깨동무하고 벌교 기운들이 하나로 뭉쳐지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시절 홍교다리는 봉림 쪽으로는 통나무 다리였다. 큰물이 날 때마다 읍내에서는 다리가 떠내려 갈까봐 모두들 걱정하였다. 학교에서도 소화다리로 건너가라고 하였지만 시뻘건 황톳물이 금방이라도 다리를 삼켜버릴 것만 같은 철없는 물구경이 그렇게 재미있었다. 큰 물난리가 나면 초가지붕에 개가 타고 둥둥 떠내려 왔고 돼지가 수영을 그렇게 잘하는지도 그때 알았다. 지금은 다리 아래 갈대숲이 우거져있지만 그 시절에는 은빛 모래 백사장은 우리들의 놀이터이자 꿈을 키워가는 요람이었다, 일요일이면 다리 밑 백사장에서 씨름도 하고 닭쌈도 하면, 난간에서 구경하던 동네 어르신들은 “ 앗따 저놈이 누 집 아들이다요? 크면 한자리 할 놈이요” 치사도 듣고 친구들과 함께 호연지기를 기르던 곳 이었다.
얼마 전 홍교다리에 서 보니 감회가 새롭다, 날 업고 다니시며 휭계다리 토속적 신에게 간구하시던 우리 어머님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고, 명절이면 다리 난간에서 객지살이 자식들을 기다리시던 모정도 아련하다. 함께 자라며 싸우고 뛰놀던 동무들은 지금은 어찌 살고들 있을까? 홍교다리 앞 부용산은 저리도 푸르고, 밀려왔다 밀려가는 남해바닷물처럼 가버린 세월 속에 그리운 사람들아! 홍교다리에서 벌교를 추모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