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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훈(月暈) / 박용래

박상화 5 4,417


월 훈(月暈)

       - 박용래 -

  

첩첩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 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꽁깍지처럼 후미진 외딴 집, 외딴 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 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를 깎기도 하고 고무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溫氣)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 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문학사상>(1976)-

 

 

박용래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박용래 시인 / 사진작가 육명심 

 

시인은 생활 자체가 시여야 한다

- 박용래 시인의 눈물과 방랑의 삶에 대하여 -

 

 

                                                                              김 금용 시인

 

눈물겹지 않은 게 없다

 

생전의 박용래 시인은 울보였다. 초라한 행색으로 불쑥 나타나 술 사달라며 반갑다고 울곤 했다. 신경림 시인도 눈이 펑펑 내리던 1970년 말 처음 만났는데 술에 거나하게 취한 모습으로 울기부터 했다고 『시인을 찾아서』에서 쓴 바 있다. 조산원 산파노릇을 하던 부인 대신 다섯 아이를 돌보며 주부노릇을 하던 그로서는 주변의 눈치로 맘이 궁했을지도 모른다. 더러 그를 피하는 시인들이 있었을 터이지만 그의 울음은 결코 궁색한 자신의 현실이나 가난, 혹은 허무감, 삶에 대한 좌절이나 분노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1984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낸 그의 유고 시선집 『먼바다』의 부록으로 실린 소설가 이문구의 ‘박용래 약전’을 읽어보면 그의 눈물바람은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는 상고를 졸업하고 조선은행(한국은행 전신)에 들어가 현찰을 가득 실은 곳간차를 블라디보스톡까지 호송할 때 눈발 내리는 두만강 철교를 건넜는데, 눈물이 쏟아지더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이문구에게 들려주며 다시 아침 9시 반부터 밤 9시 반 너머 여관방에 쓰러져 잠들 때까지 쉬지 않고 울더라는 것이다.

 

“그 때 내 눈에는 무엇이 보였겄네? 눈! 그저 눈! 쌓인 눈, 쌓이는 눈,,, 아무 것도 안보이구 눈천지더라, 그 눈을 쳐다보는 내 마음은 워땠겄냐? 이 내 심장이 워떴겠어? ... 나는 울었다, 그냥 울었다. 두만강 눈송이를 바라보며 한없이 그냥 울었단 말여,,,,,”

 

 

내 주위 남자 중에 눈물을 온종일 흘리는 남자를 본 적이 없어서 조금은 반신반의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문구가 또 한 번 기막힌 울음을 본 것은 1975년 겨울 어느 날, 눈이 연이틀 내리자 이틀 낮 하루 밤을 박용래시인은 임강빈 시인과 함께 동숙하며 술을 마셨는데 오류동 자택 앞에서 다시금 술 한 잔 하자며 또 울었다는 것! 왜 그는 이토록 자주 우는 남자가 되었을까?

가만히 그의 시집을 덮고 생각을 해본다. 분명 그의 프로필을 살펴볼 때 허약한 남자가 아니다. 오히려 기인이라고 할 정도로 엉뚱하고도 용감하다. 누구나 가난을 벗어나려 애를 쓰던 시절, 감히 직장을 내팽개치고 친구 과수원이며 부산에 농장을 차린 김소운씨를 찾아가 농사일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그의 눈물은 가난 때문에 흘린 것이 아니었다. 여린 마음이나 애달픔에 운 것도 아니었으며 외로움이나 허무함, 존재가치의 덧없음이나 우울증에서 오는 울음 또한 아니었다.

오히려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자연의 신비로운 존재들은 그를 감동시켰고, 그 존재의 아름다움 때문에 눈물겨웠다는 것이다. 이문구의 표현에 의하면, “갓 태어난 아기 새의 날개짓, 오지 굴뚝의 청솔 타는 저녁나절의 연기, 뒷간 지붕위에 호박넝쿨, 미루나무 호드기 소리, 겨울밤에 눈발 날리는 소리” 등등, 온 누리의 살아있는 생명체들과 우주천체의 신비한 모습에서 비롯되는 감동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순수한 생명체에 대한 경외감에서, 거기서 비롯된 울음으로 시를 썼던 것이다.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바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_「그 봄비」 <『현대시학』. 1969. 4>

 

 

윗 시는 정형시조의 형태를 지녔다. 절제된 시어에 함축된 감정에도 불구하고 1, 2행 끝 종결어가 ‘운다’이다 .그러나 이 눈물은 ‘노래한다’처럼 들린다. 그만큼 봄비가 주는 은혜로움, 새 생명의 잉태, 부활을 알려주는 다정한 속삭임들로 눈물이 넘친다. 고루 흘러넘치는 봄비는 한쪽이 으스러진 채 쓰다 버려 마당 한구석에서 비를 맞는 돌절구에도 고루 넘쳐 비천함을 메워 주고 있지 않은가. 어찌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으랴....

 

반면 1950년 6.25 사변으로 친구네 과수원에 머무를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미처 몰랐던 그는 고향을 떠올릴 적마다 또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눌더러 물어볼까 나는 슬프냐 장닭 꼬리 날리는 하얀 바람 봄길 여기사 扶餘, 故鄕이란다 나는 정말 슬프냐 「

                                                                     -「故鄕」<1960, 3>

 

 

 

겨울 꽝꽝나무이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을 못견디게 그리워하는 것은 激情이다. 미워하는 사람을 못견디게 미워하는 것도 일종의 격정이랄 수밖에, 나에게 격정이 있었을까, 글을 쓰고 싶어 못견디는 것도 격정의 소산이라면 그런 白書의 격정을 죽도록 갖고 싶다. ,,,중략,,,

내사 새라면 판소리나 한마당 멋들어지게 뽑을 줄 아는 콩새이고 싶다. 두두둥 북이라도 칠 줄 아는 북새이고 싶다. 아니면 群山港 가까운 路邊의 겨울 꽝꽝나무이고 싶다“

                                                                                   _「月暈」의 ‘시작노트’에서

 

 

정한모는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박용래 시인만의 아성을 갖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지만, 박용래 그 자신은 만족할 수 없는 시에 대한 짝사랑, 시에 대한 격정이 한결 같았다는 점에서 감동을 넘어 존경심까지 생긴다. 그는 우리 한국시사에 한 획을 긋는, 자신만의 색깔을 갖은 시인이었음에도 자신의 시에 대한 열정은 그토록 꺼질 줄 몰랐던 것이다.

그의 시의 두드러진 특징은 향토적 서정성을 바탕으로 누구보다도 시어 절제가 강하다. 종결어미가 극도로 생략되고 반복에 의한 리듬으로 수채화 한 점을 그려나가듯, 때론 세밀화를 그려나가듯 한 자 한 자에 혼을 불어넣는다. 내면적으로는 가난과 고독, 소외된 이들에 대한 애정이 삶의 고단함 속에 아픔으로 혹은 쓸쓸함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근본적으론 이를 초탈하고자 몸소 실천하는 삶을 살려고 애썼던 의지의 시인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외유내강의 격정 많은 시인이었다.

“글을 쓰고 싶어,,,,..白書의 격정을 죽도록 갖고 싶다.”고 소원함에 그치지 않고 그 격정을 지키기 위해 시에만 중심을 두고 살다간 시인이었다. 좋은 직장도 마다하고 마흔 살에 처음으로 마련한 대전 오류동 작은 초가집에 살 때부터는 아예 교사 자리도 그만 두었다. 그리고 다섯 아이를 돌보며 가정주부 노릇까지 서슴지 않았으니 눈물 많은 마른 체구 어디에서 그런 결정과 용기가 있었는지,, 그러고 보면 그의 길지 않은 55년간의 삶의 현장은 늘 시를 위해 남들이 보기엔 이해하기 힘든 기행을 마다 않던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방랑 시인이었다

 

 

아버지의 경제력과 교육열 덕분에 부여에서 육로와 수로의 중심 강경시내로 이주하여 강경상고에 입학했다. 미술과 정구선수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했던 그는 대대장까지 지내며 전교 1등으로 졸업했다. 그런 수재였기에 바로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구두시험만으로 입사를 할 수 있었으리라.

그는 당시 강경 여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우등생이며 대대장을 지낸데다 곱상한 외모까지 더해져 여학생들은 그의 뒤를 쫓아다녔다. 그런데 정작 그는 여학생들을 피하고 줄행랑을 치는 바람에 여학생들은 원망과 답답함에 나중엔 돌팔매질까지 했다. 그는 왜 그토록 피했던 것일까? 거기엔 누이의 죽음이 있었다.

 

 

梧桐꽃 우러르면 함부로 怒한 일 뉘우쳐진다

잊었던 무덤 생각난다

검정치마, 흰 저고리, 옆가르마, 젊어 죽은 鴻來 누이 생각도 난다

오동꽃 우러르면 담장에 떠는 아슴한 대낮

발등에 지는 더디고 느린 遠雷.

                                                                     -「담장」_ <『현대시학』. 1970. 4>

 

윗 시에서 보듯 그에게는 어려서부터 노을 지는 모습이 어디보다 아름답다는 늘뫼 언덕을 넘나들며 놀던 한 분의 누이가 있었다. 그러나 곧 시집간 鴻來누이가 산고를 이기지 못해 세상을 떴다. 그 누이의 죽음이 준 충격과 우울 그리고 허무, 심지어 삶에 대한 회의와 신에 대한 불신으로 그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바뀌어 여학생들을 피하게 됐던 것이다. 따라서 누이와 함께 지냈던 가슴 시린 회상과 더불어 영원한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슬픔이 윗 시「담장」외에도 시「下棺」에서는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수레바퀴로 끼는 살얼음/바닥에 지는 햇무리의 /下棺 / 線上에서 운다/ 첫 기러기떼” 에서도 누이의 이름인 기러기 홍鴻을 관이 묻히는 순간의 ‘기러기떼’로 이미지화해서 표현하고 있다.

주변으로부터 선망의 대상이자 미래가 보장됐던 그가 은행직을 그만 두고 떠돌이처럼 교직을 전전하다가 이마저 사직한 건 누이의 사별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1943년 은행 본점에서 현금 냄새나 맡는 단순직에 실망했고 복잡한 서울생활에 안주하지 못한 데에 큰 원인이 있겠지만,,,

태평양 전쟁이 한창일 때 위험을 무릅쓰고 현금을 수송하는 호송원이 된 것도 적응 안되는 현실로부터의 비상 탈출이었을 것이다. 결국 1945년 7월 초 사직하자마자 나온 징집영장을 들고 8월 14일 죽음의 길인 징용에 끌려갔다. 그런데 집합장소인 용산역에 도착했을 때 8.15 해방을 맞았으니, 역사의 산 증인으로 그가 깨단 것은 목표 있는 새 희망을 향한 돌진이었을 것이다.

이후 그는 자기 안에서 꿈틀거리는 근원적 물음에 귀를 기울이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통해 ‘비워내기’를 시도했던 것이다. 이율배반적인 현실로부터 자연에게로 접근하고자 나름의 달관을 모색하고 실천하고자 했다. 해방 후 다시 은행에 복귀하라는 권유도 마다하고 대전에 내려가 철도학교에서 상업과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직을 택한 것이나 “시인은 생활 자체가 시여야 한다“는 소신대로 일본에서 돌아와 부산에서 농장을 하던 김소운을 찾아가 50일간 농사를 짓던 것도 바로 그런 연유라 하겠다.

그는 이후 처음으로 고독을 알게 했던 도시의 학교들보다는 자청하여 농촌의 학교를 찾아가곤 했다. 흙에 묻혀 사는 이들의 눈물겨운 가난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지도 않았으며 원망하지도 않았다. 흙에서 나고 자라는 작은 아웃사이더 생명들의 애틋함이나 아름다움을 발견, 말을 걸고 귀를 기울이는 ‘돌보는 사랑’을 시로 표현했던 것이다. 이때 발표된 많은 시 대부분에서 가난하나 작은 소외된 것들에 쏟는 사랑이 오롯이 어진 어머니의 따뜻한 시선으로 잘 드러나 있다.

 

 댕댕이 넝쿨, 가시덤불

헤치고 헤치면

그날 나막신

쌓여 들어있네

나비 잔등에 앉은 보릿고개

작두로도 못 자르는

먼 삼십리

청솔가지 타고

아름 따던 고사리순

할머니 나막신도

포개 있네

빗물 고인 千의 山

겹겹이네

                                        -「千의 산」

 

 

이 시는 가는 붓으로 그려낸 세밀화 같다. 언뜻 보면 박목월의 향토적 서정시들과 닮은 듯하다. 그러나 조금 더 찬찬히 읽어보면, ‘댕댕이 넝쿨, 가시덤불’이라든가 ‘ 고사리순’ ‘나비잔등’ ‘청솔가지’ ‘빗물 고인 千의 山’ 등의 시어에 반전이 있음이 느껴진다. 시어 하나하나마다 중첩적 의미가 ‘겹겹’으로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즉, 댕댕이 넝쿨처럼 엉키고 가시덤불처럼 성근 할머니의 삶이 댓돌 위에 포개져 있는 나막신으로 중첩된다. 쉼없이 목숨줄을 잡아당기는 보릿고개는 가냘픈 나비잔등에 올라앉은 형세임에도 좀체 ‘작두로도 못 자르는’ 모질고 질긴 가난을 상징한다. 결국 북망산으로 떠난 할머니의 나막신이 홀로 첩첩산중에 갇힌 듯 살다간 한 생의 절절한 외로움을 드러내고 있다. 인생무상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한 생을 마치고 간 그 할머니의 존재를 아무도 모르는 채 잠시 뜬구름처럼 보내고 마니,,,오직 천개의 산이 겹겹으로 에워싸고 눈물 흘리듯 빗물 고이며 할머니의 헛헛한 죽음을 조문하고 있다.

 

 

샘바닥에

걸린 下弦

 

얼음을 뜨네

살얼음 속에

 

동동 비치는 두부며

콩나물

 

삼십원 어치의 아침

銅錢 몇 닢의 出帆

____ 지느러미의 무게

 

구수한 하루

아깃한 하루

                                               - 「샘터」<『신동아』. 1973. 2>

 

 

이 작품 역시 가난한 겨울을 샘 바닥에 걸린 하현달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자정에 떠서 한낮에 지는 하현달이 살얼음진 샘물에 둥둥 갇혀있어서 허기진 이에겐 두부며 콩나물로 보인다는 것! 허기진 아침에 눈 뜨고 샘터에서 떠올리는 물 한 바가지, 아침 해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하현달이 샘물에 숨어있을 줄이야. 삼십 원짜리 식사가 더 소중한 아침! 거기엔 누추한 가난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소박한 심성이 엿보인다. 구수하게, 아릿하게, 하루의 희망을 챙기고 싶은 그의 시정신이 엿보인다. 결핍된 것을 인정하고 다독이는 데서 오는 그의 애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외에도 같은 해 『문학사상』에 발표한 시 「시락죽」에서도 명절이기도 했던 동짓날 가난한 이들에겐 언감생심 먹을 수 없는 찹쌀 새알 든 팥죽 대신“동짓날/시락죽이나/ 끓이며/ 휘젓고 있을/ 귀뿌리 가린/ 후살이의/ 木手巾”을 그려냄으로써 가난을 투정하거나 원망하기는 커녕 잔잔한 울림이 메아리지는 슬픈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눈물겨워진다. 가난한 집에 목숨이나 연명코자 들어간 후살이의 삶을 한 편의 그림처럼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추위에 귀뿌리까지 감싼 희고 낡은 무명 목수건,,,! 마치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처럼 불기 없는 어둡고 추운 가난한 겨울 풍경이 펼쳐진다.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곡물이 거의 들어가 있지 않은 멀건 시래기죽을 끓이고 있는 후살이의 뒷모습에 절로 가슴이 시리고 절절해지는 걸 막을 수가 없다. 한 시어 한 자도 군더더기 없이 최소한의 시어로 절제해서 썼던 그는 그래서 박목월의 절제와 음률, 백석의 모더니즘을 일시에 아우른다고 혹자는 말했는지 모르겠다.

 

시인은 생활 자체가 시여야 한다

 

 

1946년 해방과 함께 그의 문학수업은 시작되었다. 즉 계룡학숙의 교사로 있을 때 ‘동백시인회’라는 동인회를 결성, 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 백건우의 부친인 백 양의 아틀리에서 문학과 미술과 음악에 심취하면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 동인지에 발표한 시편들이 박목월에게도 눈에 띄어 동인지<죽순>을 답례로 주면서 왕래를 시, 1955년 박두진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가을의 노래」와 「황토길」,「땅」으로 3회 추천 완료함으로써 1956년에 문단에 올랐다.

따라서 등단과 함께 결혼을 하면서 바로 교사직을 사직, 이때부터 부인은 정년이 되도록 공직에 머물며 살림을 다 도맡게 되었다고 한다. “시인은 생활 자체가 시여야 한다”는 평소의 신념을 나름 실천한 것이었다.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임강빈 시인을 처음 만난 것도 이즈음이었다. 공주에서 교편을 잡던 임강빈 시인도 박두진 시인의 추천을 받아 함께 나온 박용래를 만나러 학교로 찾아온 것이다. 후에 임강빈 시인이 말하길, 박용래시인의 인상은 섬세하고 순직하며 한편 여성적이랄 수 있는 목소리에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시로써 소통이 이뤄져서 친구가 되었다. 이에 임강빈 시인의 시평은 누구보다 적절하다.

 

 

“그는 조각을 하듯이 시를 썼다. 낱말 하나하나에 대한 정성은 비길 데가 없었다. 한 자 한 획도 소홀히 다룬 적이 없고, 그는 또 누구보다도 미의식이 강했다. 행간마다 무한한 침묵의 공간미를 깔아놓았고, 따라서 그의 시는 한결같이 응축되어 있고, 대담한 생략법으로 짧은 시형을 택했다.“

 

 

1957년, 연년생으로 두 딸을 낳자 처음으로 생계에 신경이 쓰여 다시 한밭중학교에 취직했다. 이 기회에 아예 술도 끊고 전원생활을 하려는 다짐으로 일 년 뒤엔 충남 당진 송악중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그 덕이었는지 1961년에 제 5회 ‘충남문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외로운 홀애비 생활이 어려웠는지 또 사직을 하고 대전으로 돌아와 퇴직금을 보태어 서대전 삼거리에 대지 55평의 작은 집을 처음으로 마련했다. 1965년 봄, 오류동 17번지였으며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 집에 정착하면서부터 그는 많은 시를 썼다. 1970년 제 1회 ‘현대시학상’을 받게 된 그의 대표작 「겨울 눈」도 바로 이 오류동 ‘청시사靑柿舍’에서 발표한 것이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저녁 눈」 <『월간문학』 1969, 4>

 

 

 

이 시의 배경은 박용래 시인의 오류동 자택 바로 옆 옴팡간 주막이다. 그의 집 옆은 허름한 제재소와 물엿가게가 있었고 짐을 나르는 마차꾼이나 손수레꾼, 지게꾼이 온종일 그곳을 드나들었다. 따라서 그 옆 작은 공터엔 그들이 들고나며 쉬어가는 처마가 자연스레 생겼는데, 바로 옴팡간 주막이었다. 그들이 식사도 하고 막걸리를 주고받으며 쉬는 동안, 처마 밑에선 나귀랑 노새, 황소랑 조랑말들까지 투레질을 하며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용래 시인 역시 툭하면 지인들이 찾아올 적마다 그곳을 자기 사랑방처럼 드나들었다.

날이 저물고 오가던 사람들이 다 따뜻한 집안으로 들어가 버린 어느 겨울밤, 눈발은 홀로 호롱불 밑에 서있는 말과 여물을 썰어주며 정을 나누고 있는 마부에게 다가오는 것을 문득 발견한 것은 아니었을까. 위로하듯 찾아와 다독여주는 눈발! 그러고 보면 하늘과 땅의 경계를 지우며 내리는 눈은 좁은 골목 안, 온종일 등에 땀이 배도록 걸었을 말발굽 아래, 어둠을 밝히는 말집의 호롱불 아래, 혹은 여물 써는 소리에, 빈터만 찾아다니며 지치고 근심 많은 소시민들의 하루를 깨끗한 흰 색으로 지워냈던 건 아니었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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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박상화
월훈은 달무리라는 뜻이랍니다. 육명심 작가님의 사진을 보다가 아는 분과 너무 닮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형님이 정장을 하시면 이 모습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 깔끔한 시를 구하시는 모습도 닮았습니다. 구글에서 육명심 작가님의 사진을 검색하시면 이름만 알던 많은 예술가의 사진이 나옵니다. 한참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김영철
아느시인은 반딧불 시를 쓰면 수백마리 반딧불이 모이고 눈 시를쓰면 하얀눈이 펄펄 나린다고 하데 월훈도 그경지의 수준이네  웬래 소중한것은 보이지 않고 소리도 저음 아니것능가 한줌 달빛의 고고함과 나즈막한 고향 풍경소리 들리듯 하네  시나 그림이나 한편 볼때마다 왠지 처철하게 목숨을 걸고 건져올린 그 혼들에 눈물이 짠 허네 쓰지 말자고 절필 하면서도 메마름의 갈증에 허덕이는 예술들  밥도 아닌데 말이네
시는 말이있는 그림이고 그림은 말이없는 시라는것을 조금씩 눈에 보이고 읽히네      ㄱ라고보니 사진이 나하구 닮아 촌디가 주르르허네
박상화
우리 가락에 귀명창이라고 있지요. 노래는 못불러도 좋은 소리는 알아듣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시를 쓰는 것도 그런 것 같습니다. 좋아서 쓰고 남의 시를 보다보면 좋은 소리는 가슴 속에서 울립니다. 뭣이 좋은 지 알아야 좋은 글을 쓰겠지요. 누가 뭐라든 자기 마음에 충만하고 눈물나는 이야기가 가장 좋은 소리고 글이고 그림이고 사진입니다. 그 안에 뼈가 있고 길이 잇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그게 진짜 밥일지도 모릅니다. 자본주의는 헛밥만 쫒게 만들고 그러다보니 기갈이 나서 아귀처럼 미친듯이 먹고 먹어도 아귀 배고프듯이 삶이 허하지요. 인생은 진짜 밥 찾는 여정이고, 그 밥심으로 사는 동안이 짧으나마 행복하고 기쁜 삶인 것 같습니다. 나를 충만하게 하던 그 순간순간과 그 순간으로 데려가주는 것이 예술일 겁니다.

박용래시인은 우리 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시인입니다. 눈물의 시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잘 우셨다고 하네요. 그런데 신경림 선생의 "시인을 찾아서"에 보면, 이문구선생을 만났을 때 밥상을 엎어버린 강단이 또 있으셨다고 해요. 제가 본문을 좀 바꿔서 박용래 시인을 소개한 김금용시인의 글을 퍼다가 놓겠습니다. 한번 읽어 보시지요.
박상화
(게시판 게시용량 한계로 내용이 다 붙질 않네요. 여기 댓글에 마저 첨부합니다.)

이 시의 절창은 ‘붐비다’ 이다. 다 늦은 저녁, 손님들 다 돌아간 옴팡간 주막에서 낮은 촉수의 호롱불 밑으로 떨어지는 눈발이 어찌 그리 붐빌 수 있으랴. 술잔을 주고받으며 떠들던 지게꾼, 짐꾼 다 돌아간 빈 골목 안으로 움직이는 실물이라곤 말과 여물을 썰어주고 들어간 마부밖에 없는데,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이 뭐 그리 붐빌까? 그것도 조랑말의 온 전신이 아닌 겨우 말발굽 밑에서 붐비다니,,,!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니,..
그렇다면 눈은 소외된 이웃들을 위로하며 다니느냐고 붐비는 건 아닐까, 축하메시지를 보내느냐고 그리 분주한 건 아닐까,,, 오, 그의 혜안이 놀랍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찾아와주는 천사의 날개가 바로 눈발이었나 되돌아보게 된다.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더니, 흰 눈을 보내어 외로운 그의 가슴까지 쓰다듬어 준 것은 아니었나 싶다.

한때 나는 한 봉지 솜과자였다가
한때 나는 한 봉지 붕어빵이었다가
한때 나는 坐板에 던져진 햇살이었다가
中國집 처마밑 鳥籠 속의 새였다가
먼 먼 윤회 끝
이제는 돌아와
五柳洞의 銅錢
                                            - 「五柳洞의 銅錢」 <유고:『심상』 1984, 10>

시 「오류동의 동전」은 그의 자화상이다. 마당 한구석에 감나무 한 그루 있다고 ‘청시사靑柿舍’ 라고 부르며 좋아했던 그는 별세할 때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방황을 끝내고 ‘먼 먼 윤회 끝’에서야 동전이 없이는 현실이 없다는 걸 절감하는 시 한 편을 남기고 55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1980년 7월 교통사고를 당해 치료를 받던 중,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11월 21일 오후 1시 안타깝게 저 생으로 돌아갔다.
그는 생전에 단 세 권의 시집을 냈다. 56년『현대문학』등단 이후 1969년에 한국시인협회 주관으로 펴내기 시작한 ‘오늘의 한국시인선집’ 시리즈로 첫시집『싸락눈』을 등단 13년 만에 냈다. 이어 1975년 ‘오늘의 시인총서’로 제2시집이자 시선집인 『강아지풀』(민음사), 다시 4년 뒤인 1979년엔 ‘현대시인선’으로 제 3시집『백발의 꽃대궁』(문학예술사)을 발간했다. 지방 초야에 묻혀 중앙 시단엔 관심도 출입도 없이, 오직 시를 위해 눈물과 격정을 불살랐던 그는 생활이 시이기를 실천하며 살다간, 천부적인 시인이었다.






참고자료:

* 박용래 유고시선집 『먼바다』(창작과 비평. 1984년) 중 부록,
이문구 소설가의 <박용래 약전>
* 신경림 시인 : 『시인을 찾아서』중 <눈물과 결곡의 시인>
* 정한모 교수 『한국현대시의 현장』(박영사, 1983)
* 김석환 시인, 명지대교수 : <박용래 시의 동물기호 연구>
* 박주택시인, 경희대교수 : 『현대시의 사유구조(민음사, 2012)』중 <박용래 시에 나타난 응시와 욕망 연구>


필자 .김금용 : 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광화문 쟈콥』『넘치는 그늘』『핏줄은 따스하다, 아프다』,
                        중역시집『今天與明天的歌』외 2 권.. 펜번역문학상, 동국문학상.. 2015년 세종 우수도서 선정.
신경현
저 사진을 보니 정말 영철형님하고 똑 같네요^^...시를 대하는 태도와 마음 가짐도 박용래 시인과 형님이 비슷하게 보이네요..추석 잘 보내셨나 모르겠네요..아침 저녁 쌀쌀한 바람에 감기 조심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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