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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그륵> <선암사 뒤간에서 뉘우치다> - 정일근

박상화 0 1,247

어머니의 그륵 

                - 정일근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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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뒤간에서 뉘우치다 

 

                    - 정일근 

 

  

무위도식의 오후, 불식을 했다면 산암사 뒷간으로 찾아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녁 예불시간 뱃속 근심이 큰 장독에 고인 물처럼 출렁거려 뒷간에 앉는다. 사실 나는 내 죄를 안다. 그리하여 범종소리 따라 한 겹 한 겹 밀려와 두꺼워지는 어둠에 엉덩이를 깔고 뉘우친다. 가벼워진 세상의 발들 殿을 돌아 장등丈燈이 밝혀주는 애웅전 앞 섬돌을 밟고 오를 시간, 나는 뒷간 무명 속에 발 저리도록 쪼그리고 앉아 진실로 뉘우친다. 

 

내 죄의 반은 늘 식탐에 있다. 법고소리에 기름진 가죽이 함께 울고, 목어의 마른 울음 오장육부를 북북 긁고 간다.  운판 소리의 파편이 뼈 마디마디 파고들어 욱신거린다. 선암사 뒷간에 앉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근심을 버리자! 근심은 버리려 하지 말고 만들지 말아라. 뒷간 아래 깊은 어둠이 죽비를 들어 내 허연 엉덩이를 사정없이 후려친다. 마음을 비우자! 마음은 처음부터 비워져 있는 것이다.  나무 벽 틈새로 스며들어온 꽃샘바람이 주장자를 들어 내 뺨을 친다. 

 

뱃속 근심이 우주의 근심을 만드는 저녁, 염주알 구르는 작은 원융의 소리에도 사방 십리 안 모든 봄나무들이 깨달음의 문을 열어 꽃등불을 켜는데, 나는 내 몸의 작은 뒷문 하나 열지 못하고, 단 몇 푼의 근심조차 내버리지 못한 채 선암사 뒷간에 쪼그리고앉아 뉘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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