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물 속의 집>외 - 이상국

해방글터 3 1,895

 

이상국 

 

1946년 강원 양양군 출생 

시집 <동해별곡> <우리는 읍으로 간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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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속의 집>

 

 

그해 겨울 영랑호 속으로

빚에 쫓겨온 서른세살의 남자가

그의 아내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가던 날

미시령을 넘어 온 장엄한 눈보라가

네 켤레의 신발을 이내 묻어주었다

 

고니나 청둥오리들은

겨우내 하늘 어디선가 결 고운 물무늬를 물고 와서는

뒤뚱거리며 내렸으며

때로 조용한 별빛을 흔들며

부채를 청산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인근 마을까지 들리고는 했다

 

얼음꽃을 물고

수천마리 새들이 길 떠나는 밤으로

젊은 내외는 먼 화진포까지 따라 나갔고

마당가 외등 아래서

물고기와 장난치던 아이들은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 애들이 얼마나 추웠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의 뺨을 적신다

 

그래도 저녁마다

설악이 물 속의 집 뜨락에

아름다운 놀빛을 두고 가거나

산그림자 속 화암사 중들이

일부러 기웃거리다 늦게 돌아가는 날이면

영랑호는 문을 닫지 않는 날이 많았다

 

그런 날은 물 속의 집이 너무 환하게 들여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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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가족>

 

 

- 아버지 송지호에서 좀 쉬었다 가요 

- 시베리아는 멀다 

- 아버지 우리는 왜 이렇게 날아야 해요 

- 그런 소리 말아라 저 밑에는 날개도 

없는 것들이 많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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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로(寒露)> 

 

 

가을 비 끝에 몸이 피라미처럼 투명해진다 

 

한 보름 앓고 나서 

마당가 물수국 보니 

꽃잎들이 눈물 자국 같다 

 

날마다 자고 나면 

어떻게 사나 걱정했는데 

아프니까 좋다 

헐렁한 옷을 입고 

 

나뭇잎이 쇠는 세상에서 술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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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 포장마차> 

 

마차는 달린다 

흙먼지 속에 채찍을 휘두르며 밤새 달린다 

누우런 알전구에 제 그림자를 비추며 

덜컹덜컹 역전 같은 데를 달리는데 

울퉁불퉁 변두리만 달리는데 

말이 쓰러졌는데 마차만 남아서 

계속 달리다가 배고파서 

우동이나 말아 먹이며 달리다가 

주꾸미에 소주나 마시며 달리다가 

아무리 달려 봤자 개척할 땅도 없고 

네비게이션도 없고 딱지만 떼이니까 

마침내 우리 동네 아파트 앞 가게 한 칸을 얻어들고는 

대머리 인디언 같은 주인은 

그래도 갈 길이 멀다고 

제 몸에다 밤새 채찍질을 해대는데…… 

 

 

/문학·선 /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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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치킨집을 위한 변명>

 

 

눈이 오다 그치고 어쩌다 

한잔 생각이 간절한 저녁, 

 

가게들이 더러 셔터를 내리는 그 시간에 

마누라 눈치를 보아가며 기어이 

후라이드 반 양념 반을 주문한다면 

치킨집 주인도 좋아하겠지 

 

벌거벗은 채 차례를 기다리던 닭들도 

얼른 기름 가마 속으로 들어가며 몸을 풀겠지만 

저녁 내내 어정거리던 알바 청년은 

얼마나 신이 나서 골목길을 달려오겠니 

 

거기다 소주나 맥주 천쯤 같이 시킨다면 

초저녁부터 갑갑한 통 속에서 

사내들의 오르내리는 목젖과 

출렁이는 뱃구레를 그리워하며 그것들은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몸을 흔들겠지 

걸그룹처럼 춤을 추며 달려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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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도둑>

 

 

도둑이 뛰어내렸다 

추석 전날 밤 앞집을 털려다가 퉁기자 

높다란 담벼락에서 우리 차 지붕으로 뛰어내렸다. 

 

집집이 불을 환하게 켜놓고 이웃들은 골목에 모였다. 

 

―글세 서울 작은 집, 강릉 큰애네랑 거실에서 술을 마시며 고스톱을 치는데 거길 어디라고 들어오냔 말야. 

앞집 아저씨는 아직 제 정신이 아니다. 

―그러게, 그리고 요즘 현금 가지고 있는 집이 어딨어, 다 카드 쓰지. 거 돌대가리 아냐?라고 거드는 피아노집 주인 말끝에 명절내가 난다. 

한참 있다가 누군가 이랬다. 

―여북 딱했으면 그랬을라고……, 

 

이웃들은 하나 둘 흩어졌다. 

밤이슬 내린 차 지붕에 화석처럼 찍혀있는 도둑의 족적을 바라보던 나는 그때 허름한 추리닝 바람에 낭떠러지 같은 세상에서 뛰어내린 한 사내가 열나흘 달빛 아래 골목길을 죽을 둥 살 둥 달려가는 걸 언뜻 본 것 같았다. 

 

 

/내일을 여는 작가 / 2008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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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계도하다>

 

 

어느날 나는 본의 아니게 국민을 계도했네 

'올바른 음주문화 정착' 팻말을 들고 

아는 사람 만날까봐 고개를 있는 대로 숙이고 

음주 단속하는 경찰 옆에서 

딴전을 보며 두어시간 버티면 

면허정지 기간에서 깎아주는 열흘을 벌려고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국민이란 걸 계도했네 

그렇잖아도 조잔하고 비굴하게 허겁지겁 

어떡하든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을 

국가라는 게 참 더럽고 치사하게 

고작 점심에소주 몇잔 한 걸 가지고 

정말 이렇게 못살게 굴어야 하는지 어디 

두고 보자며 국민을 계도했네 

근무 끝나면 한잔하자며 

새파란 경찰들은 음료수를 나눠 마시고 

하루벌이를 마친 선량한 국민들은 

그들의 정중한 경례를 받으며 

사뭇 거만하게 집으로 돌아가는데 

어두운 고가도로 아래서 

나는 국민을 계도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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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찍 돌아가자

골목길 감나무에게 수고한다고 아는 체를 하고

언제나 바쁜 슈퍼 집 아저씨에게도

이사 온 사람처럼 인사를 하자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불은 있는 대로 켜놓고

숟가락을 부딪치며 저녁을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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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 가는 길>

 

 

 

물은 산을 내려가기 싫어서 

못마다 들러 쉬고 

쉬었다가 가는데 

나는 낫살이나 먹고 

이미 깎을 머리도 없는데 

어디서 본 듯한 면상(面相)을 자꾸 물에 비춰보며 

산으로 들어가네 

 

어디 짓다 만 절이 없을까 

 

아버지처럼 한번 산에 들어가면 나오지 말자 

다시는 오지 말자 

나무들처럼 

중처럼 

슬퍼도 나오지 말자 

 

 

 

만해(萬海)도 이 길을 갔겠지 

어린 님을 보내고 울면서 갔겠지 

인제 원통쯤의 노래방에서 

땡초들과 폭탄주를 마시며 

조선의 노래란 노래는 다 불러버리고 

이 길 갔겠지 

 

그렇게 님은 언제나 간다 

그러나 이 좋은 시절에 

누가 그깟 님 때문에 몸을 망치겠는가 

내 오늘 세상이 같잖다며 

누더기 같은 마음을 감추고 백담(百潭) 들어서는데 

늙은 고로쇠나무가 속을 들여다보며 

빙긋이 웃는다 

나도 님이 너무 많았던 모양이다 

 

 

 

백담을 다 돌아 한 절이 있다 하나 

개울바닥에서 성불한 듯 이미 

몸이 흰 돌멩이들아 

물이 절이겠네 

그러나 이 추운 날 

종아리 높게 걷고 

그 물 건너는 나무들, 

평생 땅에 등 한번 못 대보고 

마음을 세웠으면서도 

흐르는 물살로 몸을 망친 다음에야 

겨우 저를 비춰보는데 

나 그 나무의 몸에 슬쩍 기대 서니 

물 아래 웬 등신 하나 보이네 

 

 

 

그러나 산은 산끼리 서로 측은하고 

물은 제 몸을 씻고 또 씻을 뿐이니 

저 산 저 물 밖 

누명이 아름다운 나의 세속 

살아 못 지고 일어날 부채(負債)와 

치정 같은 사랑으로 눈물나는 그곳 

 

나는 누군가가 벌써 그립구나 

 

절집도 짐승처럼 엎드려 먼산 바라보고 선 

서기 이천년 첫 정월 설악 

눈이 오려나 

나무들이 어둠처럼 산의 품을 파고드는데 

여기서 더 들어간들 

물은 이미 더할 것도 낼 것도 없으니 

기왕 왔으면 마음이나 비춰보고 가라고 

백담은 가다가 멈추고 멈추었다 또 가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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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역 4번 출구>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 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大地)의 소작(小作)이다 

내 조상은 수백 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 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 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 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 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 얼마를 낸다 

그것은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그 애는 나를 안아준다 아빠 잘 가 

 

 

/월간『문학사상』(2010,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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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여러 해 전이다. 

내설악 영시암에서 봉정 가는 길에 

아름드리 전나무와 등칡넝쿨이 

엉켜 붙어 싸우고 있는 걸 보고는 

귀가 먹먹하도록 조용한 산중에서 

목숨을 건 그들의 한판 싸움에 

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적어도 싸움은 저쯤 돼야 한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었다 

산속에서는 옳고 그름이 없듯 

잘나고 못나고가 없다. 다만 

하늘에게 잘 보이려고 저들은 

꽃이 피거나 눈이 내리거나 

밤낮없이 살을 맞대고 

황홀하게 싸우고 있었던 것인데 

올 여름 그곳에 다시 가보니 

누군가 넝쿨의 아랫도리를 잘라 

전나무에 업힌 채 죽어 있었다 

나는 등찱넝쿨이 얼마나 분했을까 생각했지만 

싸움이 저렇게도 끝나는구나 하고 

다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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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아직 따뜻하다> 

 

 

흐르는 물이 무얼 알랴 

어성천이 큰 산 그림자 싣고 

제 목소리 따라 양양 가는 길 

부소치 다리 건너 함석집 기둥에 

흰 문패 하나 눈물처럼 매달렸다 

 

나무 이파리 같은 그리움을 덮고 

입동 하늘의 별이 묵어갔을까 

방구들마다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어둠을 입은 사람들 어른거리고 

이 집 어른 세상 출입하던 갓이 

비료포대 속에 들어 바람벽 높이 걸렸다 

 

저 만리 물길 따라 

해마다 연어들 돌아오는데 

흐르는 물에 혼은 실어보내고 몸만 남아 

사진액자 속 일가붙이들 데리고 

아직 따뜻한 집 

 

어느 시절엔들 슬픔이 없으랴먄

늙은 가을볕 아래 

오래 된 삶도 짚가리처럼 무너졌다 

그래도 집은 문을 닫지 못하고 

다리 건너오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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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에서의 하룻밤>

 

 

해지고 어두워지자 

산도 그만 문을 닫는다 

 

나무들은 이파리 속의 집으로 들어가고 

큰 바위들도 팔베개를 하고 

물소리 듣다 잠이 든다 

 

어디선가 작은 버러지들 끝없이 바스락거리고 

이파리에서 이파리로 굴러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새들은 몇번씩 꿈을 고쳐 꾼다 

 

커다란 어둠의 이불로 봉우리들을 덮어주고 

숲에 들어가 쉬는 산을 

별이 내려다보고 있다 

 

저 별들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기나 하는지 

저항령 어둠속에서 

나는 가슴이 시리도록 별을 쳐다본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 창작과 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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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

 

 

사람이 사는 동네에 

달이 와 사는 건 

울타리가 없어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지붕 꼭대기에 

달의 문패를 달아주었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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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큰 산이 작은 산을 업고 

놀빛 속을 걸어 미시령을 넘어간 뒤 

별은 얼마나 먼 곳에서 오는지 

 

처음엔 옛사랑처럼 희미하게 보이다가 

울산바위가 푸른 어둠에 잠기고 나면 

너는 수줍은 듯 반짝이기 시작한다 

 

별에서는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별을 닦으면 캄캄함 그리움이 묻어난다 

별을 쳐다보면 눈물이 떨어진다 

 

세상의 모든 어두움은 

너에게로 가는 길이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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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감자를 묻고 나서 

삽등으로 구덩이를 다지면 

뒷산이 꽝꽝 울리던 별

 

겨울은 해마다 닥나무 글거리에 몸을 다치며 

짐승처럼 와서는 

헛간이나 덕석가리 아래 자리를 잡았는데 

천방 너머 개울은 물고기들 다친다고 

두터운 얼음옷을 꺼내 입히고는 

달빛 아래 먼길을 떠나고는 했다 

 

어떤 날은 잠이 안 와 

입김으로 봉창 유리를 닦고 내다보면 

별의 가장자리에 매달려 봄을 기다리던 마을의 어른들이 

별똥이 되어 더 따뜻한 곳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하늘에서는 다른 별도 반짝였지만 

우리 별처럼 부지런한 별도 없었다 

 

그래도 소한만 지나면 벌써 거름지게 세워놓고 

아버지는 별이 빨리 돌지 않는다며 

가래를 돋워대고는 했는데 

 

그런 날 새벽 여물 끓이는 아랫목에서 

지게 작대기처럼 빳빳한 자지를 주물럭거리다 나가보면 

마당에 눈이 가득했다 

 

나는 그 별에서 소년으로 살았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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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별에서 내리면>

 

 

이 별에서 내리면 

다른 별에 가 살 수는 없을까 

 

이렇게 푸른별이 

하늘에 단 하나뿐이고 

때가 되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 별에서 내려야 한다면 

 

우리가 술도 못 먹고 

시 같은 건 안 써도 좋으니 

또 다른 별에서 만날 수는 없는지 

 

사람이 너무 많아 불편하다면 

이 보다는 좀 못하더라도 

내리는 사람끼리 만나 사는 별은 없는지 

 

 

/계간 포에지 2000 겨울호, 나남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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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게로 가는 길>

 

 

별 보면 섧다 

 

첫새벽 볏바리 가는 소 눈빛에 어리고 

저물어 돌아오는 어머니 

호미날에도 비치던 그 별 

 

어둠의 거울이었던 

고향집 우물은 메워지고 

이제 내 사는 곳에서는 

별에게로 가는 길이 없어 

 

오래 전부터 

내가 소를 잊고 살듯 

별쯤 잊고 살아도 

 

밤마다 별은 

머나먼 마음의 어둠 지고 떠올라 

기우는 집들의 굴뚝과 

속삭이는 개울을 지나와 

아직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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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프킬라를 뿌리며>

 

 

자다 일어나 에프킬라를 뿌린다 

 

향긋한 안개가 퍼지고 

나를 공격하던 모기들은 입이 무너지고 날개가 녹아내리고 

죽었다. 

 

싸움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은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수십만이 하루살이처럼 죽었다 

 

그들은 다시 베트남에 고엽제를 살포하여 

초목의 씨가 마르고 

수백만의 인민들이 죽거나 천천히 썩었다 

 

나는 모기에게 이긴 게 아니라 

그가 공격하면 나도 맨손으로 싸워야 했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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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미친 여인에게>

 

 

지난 가을 

우체국 돌계단에 

은행나무 이파리 모아놓고 

히죽히죽 살림살 때 벌써 허리가 절구통 같더니 

모진 겨울 어디 가 몸풀고 

거뜬하게 나왔느냐 

 

어느 천벌을 받을 놈이 몹쓸 짓 했느냐며 

눈발 날리고 얼음 어는데 

저 간나 어쩌겠냐며 

온 시민이 걱정했는데 

 

이 봄 

햇살 수북하게 쌓인 

전매서 울타리 아래 앉아 

머리 풀어헤치고 빗질하는 네가 고마워서 

사람들은 가다가 보고 

또 돌아보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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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개울물이 밤새 닦아놓은 하늘로 

일찍 깬 새들이 

어둠을 물고 날아간다 

 

산꼭대기까지 

물 길어 올리느라 

나무들은 몸이 흠뻑 젖었지만 

햇빛은 그 정수리에서 깨어난다 

 

이기고 지는 사람의 일로 

이 산 밖에 

삼겹살 같은 세상을 두고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나는 벌레처럼 잠들었던 모양이다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이슬이었을까 

또다른 벌레였을까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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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힘을 다해>

 

 

해가 지는데 

왜가리 한마리 

물속을 들여다 보고 있다 

 

저녁 자시러 나온 것 같은데 

 

그 우아한 목을 길게 빼고 

아주 오래 숨을 죽였다가 

가끔 

있는 힘을 다해 

물속에 머릴 처박는 걸 보면 

 

사는 게 다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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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해방글터
인터넷에서 시를 모으면서 읽고, 텍스트화일로 정리하면서 읽고, 붙여 넣으면서 읽었다.
그는 맘 좋은 아저씨처럼 넉넉하고, 졸졸 따르던 형처럼 입담도 좋다. 사물을 보는 깊은 눈과 한줄한줄 생각 많이한 시행들 사이를 한나절 내내 밭고랑 따라가듯 따라다녔다. 그를 따라다니다가 내 딱딱한 심장은 뭉친 근육이 풀리고 박동에 여유가 생겼다. 첫인상이 좋고, 알고보니 재밌고, 두고보니 깊이 생각하게 하는 좋은 사람을 만난 즐거운 시간이었다. 독자를 편안하고 재미있게하고 머물게 하는 이런 시가 참  좋은 시구나 싶었다.
개인적으로 <물 속의 집>과 <백담 가는 길>을 손 꼽았으나, 모두 시원한 샘물 같은 시편들이라 지친 누구든 그의 시로부터 머무는 잠시의 휴식을 바라 붙여 올린다.
조성웅
숙취에 깨어 나 처연하게 길 따라 나섰다 허름한 집에 사는 마음 곧은 사람을 만났구나 ㅎ
molla
그랬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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