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 김사인

해방글터 0 660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며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 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니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속같이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 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눈에는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도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중에서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밴드로 보내기

Comments

카테고리
반응형 구글광고 등
최근통계
  • 현재 접속자 1 명
  • 오늘 방문자 111 명
  • 어제 방문자 367 명
  • 최대 방문자 2,936 명
  • 전체 방문자 462,086 명
  • 전체 회원수 15 명
  • 전체 게시물 15,811 개
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네이버밴드에 공유